오미야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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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 미마와리구미 설 ===
[[다이쇼 시대]]가 된 전 [[교토 미마와리구미|미마와리구미]] 대사였던 [[이마이 노부오]], [[와타나베 아쓰시 (1843년)|와타나베 아쓰시]]의 구술로, [[사사키 다다사부로]]등이 실행범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가쓰 가이슈]]는 막부 상층부의 지시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미마와리구미설이 통설이 되었으며, 여기에 의문을 나타내는 역사학자는 없다. 하지만, 이마이나 와타나베의 구술에 어긋나는 부분(자객의 인원구성, 현장에 두고 간 칼집의 소유자 등)이 있어서, 주로 작가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이설이 나오는 상황이다.<ref>[[2006년]]에 학습연구사(究社)에서 발표한『신 역사군상 시리즈 (4) 유신창세(維新創世) 사카모토 료마』에서는, [[기쿠치 아키라]]가 ‘데라다야 사건 당시에 포박한 한 사람을 살해하여 수배자가 되어, 미마와리구미가 체포하기 위해서였다.’라는 설을 제시하지만, 이 설에 관해서도 앞으로 조사가 필요하다.</ref> 또한 현장에 달려가서 나카오카 신타로를 문병한 [[다니 다테키]]는 교토 미마와리구미 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이마이 노부오]]는 증언 당시에는 자신이 망보기 역할이었을 뿐이라고 했으나, 장년~노년에 이르러서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료마를 죽였다고 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