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카미 데쓰하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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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카미는 감독 취임 후인 1961년의 춘계 캠프에서 그라운드로부터 취재진들을 내쫓아 취재 규제를 내놓았다. 애초에는 기자들로부터 이 규제에 대해서 거센 반발을 했지만 1962년부터 더욱 철저해 갔다. 이 보도관제를 언론에서는 “[[철의 장막]]”과 비교해 “데쓰의 커텐”({{lang|ja|哲のカーテン}})이라고 불렀다. 가와카미는 일본 야구계에서는 처음으로 전속 홍보를 두면서 사카모토 유키오가 처음으로 그 역할을 담당했다. 또 가와카미는 그라운드의 권한 뿐만 아니라 스카우트 부장을 겸임하는 등 팀 편성면에서도 권한을 장악하고 있어 [[영양학]], 런닝 코치제의 도입 등 신기축을 차례로 내세웠다.
* V9 시대의 유니폼은 1961년에 가와카미의 감독 취임과 함께 등장하면서 가와카미가 감독직을 용퇴하는 1974년까지 14년 간의 긴 세월에 걸쳐 사용되었다.<ref>가와카미 감독이 사임한 이후에는 폐지되었지만, 1981년에 V9시대의 스타일이 부활되었다. 홈경기용은 두 차례의 마이너 체인지를 사이에 두어 1992년까지 사용되었고, 원정 경기용이 1986년의 마이너 체인지를 사이에 두어 1992년까지
선수 시절 샌프란시스코 실즈의 스프링 캠프에 참가한 경험으로부터 선수에게는 감독, 코치에 대해서 절대 복종을 요구했지만 코치로 겸임하고 있던 [[히로오카 다쓰로]]는 이빨에 옷을 입히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으며 가와카미의 “몸으로 기억해라”라는 연습 방침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ref>말주변이 없을 정도로 무슨 일에도 열중하는 성격과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일도 많아 현역 시절의 지바, [[요나미네 가나메]], [[히로오카 다쓰로]]와는 견원지간이었다고 한다(히로오카와는 그 후에 화해를 했지만, 요나미네는 과거에 가와카미와 갈등을 일으킨 적도 있어 그 일로 인해 요미우리가 주최하는 OB회에 참석하지 않았다).</ref> 1964년에 히로오카는 야구 전문 주간지인 주간 베이스볼에서 자신의 수기를 연재했지만, 가와카미는 이에 대해 ‘감독 비판’을 감지하여 연재를 중지시켰다. 같은 해 8월 6일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고쿠테쓰 스왈로스]]전에서 0대 2로 지고 있던 7회초에 주자 3루의 상황에서 3루 주자인 나가시마가 홈스틸을 강행, 이것은 나가시마의 판단에 의한 플레이였지만 히로오카는 이것을 벤치의 사인이라고 느껴 “나의 배팅을 그렇게 신용할 수 없습니까!” 라고 격노했고, 다음 공에서는 삼진을 당해 배트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그대로 구장을 떠났다. 가와카미는 히로오카의 행동을 비판하면서 히로오카를 타 구단에 트레이드를 하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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