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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일어난 의병은 1895년의 [[을미의병]]과 1905년 이후의 [[을사의병|을사]]·[[정미의병]]이 대표적이다.
 
1895년 의병은 흔히 을미의병이라 하며 지방의 명망있는 [[선비 (호칭)|유생]]를 중심으로 단발령과 [[명성황후]] 시해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다. 초기 의병은 [[양반]] 중심의 활동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들 중에는 [[흥선대원군]] 집정기에 쇄국정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이항로]]의 문하생이 많았으며 [[위정척사]]의 명분에 의해 봉기하였다.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일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퇴조하자 을미 의병은 대부분 해산 하였다.<ref>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240 ~ 241 쪽, ISBN 89-7096-115-1 </ref>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이 가장 큰 과제로 떠올랐고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를 [[을사의병]]이라 한다. 이 시기 의병 역시 초기에는 [[최익현]] 등 지방의 명망있는 유생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투쟁 대열에서 곧 탈락되었다. 최익현은 관군이 진압하자 국왕에게 칼을 겨눌 수 없다는 봉건 윤리에 의해 스스로 투항하였고, 이 대신에 무명의 유생과 농민이 의병의 주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