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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씨 집안과 웅진 ====
한편 조부와 아버지, 그리고 예식진 본인이 모두 웅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에서 웅진(웅천)과의 지역적 연관성을 가진 집안으로 볼 수 있는데, 예(祢)라는 글자에 '친묘(親墓)' 즉 아버지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에 착안해, 웅진에 묻힌 선대 백제왕들의 무덤을 관장하는 등의 제사 주관 의무를 위임받은 가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예씨 집안이 예씨라는 성을 칭하게 된 것은 [[사비성|사비성(泗沘城)]] 천도 이후라는 주장이 있다.<ref>이도학,「백제 사비성 시대 연구」2010, p312</ref>
 
예씨 가문이 백제 조정의 주요 세력으로 득세하게 된 시점은 대체로 [[백제 무왕|무왕(武王)]]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은 재위 28년(627년) 7월 이후 '신라가 침략한 땅'인 한수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웅진성에 머무르면서 대규모 병력을 일으키고, 또한 수도 사비성의 궁궐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웅진성에 머무르기도 하는 등 웅진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또한 무왕 시대에는 왕효린 등의 중국계 가문이나, 웅진 시절 정계 외곽으로 밀려나 소외되었던 해씨ㆍ백씨 등의 옛 가문들이 대거 기용되었는데<ref>이도학,「백제 무왕의 계보와 집권 기반」『백제문화』34, 2005, 83쪽</ref>, 이 과정에서 웅진성 출신으로 그때까지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예씨 집안, 예식진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와는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