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페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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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페캄(John Peckam 1230? ~ 1292)은 1230년 경 오늘날 영국 [[서섹스]](Sussex) 지방의 패첨(Patcham)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페캄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류스(Lewes)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과 1250년대에 [[옥스퍼드]](Oxford)에 있던 [[프란체스코회]]에 입회했다는 정도 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1260년 경 옥스퍼드에서 파리로 보내져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했으며 이 때 그의 스승인 [[보나벤투라]]의 설교들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1270년 봄 [[파리대학교]]에서 프란체스코회에 할당된 신학교수직에 오른다. 1271년부터 1274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11대 프란체스코회 소속 신학교수로 재직한다. 1274년 이후 영국 프란체스코회의 9대 관구장으로 취임하며, 1277년부터 1279년까지는 교황청에서 일한다. 1279년 1월 27일 영국교회의 수장인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어 1292년 12월 8일 영면할 때까지 사상가이자 과학자로서는 물론 정치 및 행정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요하네스 페캄은 무엇보다도 [[라 마레의 기욤]](Guillaume de la Mare)과 더불어 [[도미니코회]]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최초로 공격을 가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로 사상사에 이름을 남겼다. 실제로 확실한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토코의 굴리엘모]]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기문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면전에서 맹렬히 비판한 젊고 혈기 넘치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젊은 교수를 페캄이라고 단정짓는 연구자들이 많을 정도로 그의 토마스 아퀴나스 비판이 신랄하고 끈질겼던 것은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그의 저작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헤일즈의 알렉산더]]와 보나벤투라로부터 [[아쿠아스파르타의 마테오]], [[로저 마스턴]], [[볼로냐의 바르톨로메오]]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요하네스 둔스 스코투스]]와 [[오컴의 윌리엄]]으로 꽃을 피우는 중세 프란체스코회의 사상적 전통에서 가교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수행한 사상가이자 선생님이었다. 또한 링컨의 대주교 [[로버트 그로스테스테]], [[로저 베이컨]]으로부터 이어지는 옥스퍼드의 경험학문의 전통을 잇는 중세과학의 거성으로서 그가 저술한 광학저서들이 16세기까지 서구 광학의 기본교재로서 활용되었을 정도였다. 이런 의미에서 요하네스 페캄을‘반토마스주의자’ (antithomist)로서만 다루는 것은 빙산의 일각만을 바라보는 우를 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요하네스 페캄은 그의 스승 보나벤투라에 비견될만큼 탁월한 정치행정 및 외교감각을 가진 전인적 재능의 소유자였다. 페캄은 1279년 7월 캔터베리 대주교로 부임한 뒤 레딩(Reading)에서 공의회를 열어 영국교회의 개혁에 착수하면서 모든 성당과 공소의 정문에 [[마그나 카르타]]를 게시할 것을 결정한다. 영국왕은 이 결정에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고 보고 의회를 통해 이 결정을 거부하도록 하였다. 자칫 속권과 교권 사이의 정면충돌이 될 뻔했던 이 사건에서 페캄은 현명하게 뒤로 물러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고 그 이후로 영국왕과 전반적으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대주교로서 활동했으며 특히 웨일즈 정복 당시 에드워드의 부탁을 받고 외교사절로서 웨일즈의 지배자 리벨린에게 파견되어 정복한 지역의 질서와 평화정착에 기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