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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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가 살던 당시까지 조선 사회는 외국 문화에 대해서는 굳게 문을 걸어잠그고 있었고, 지식인들은 성리학 일변도의 학문 풍조 속에서 공리공론만 일삼으며 자아도취에 빠져 정작 백성들의 현실은 외면하고 있었다. 박제가는 북경 사행을 통해 당시 조선 백성들의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을 정리해서 이 책을 지었다. 《북학의》에 논술된 국내상업 및 외국무역의 장려, 수입금지, 수출장려, 은의 해외 유출 금지, 물가의 평준화, 대량생산, 제품 규격의 규제, 전국적 시장 확대, 농공상업에 대한 국가적 후원의 강화 등에 대한 견해는 근대 유럽의 중상주의 경제 사상과 경향이 비슷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북학의》의 서문을 지은 서명응은 "이 책이 채택되어 현실에서 쓰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정녕 알 수 없겠지만, 우리 조정에서 모범이 될 책을 편찬할 때에 저 솔개나 개미가 미래를 예견하는 구실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며 이 책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고, 저자의 스승이었던 박지원도 서문을 통해 저자의 적극적인 북학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북학의》는 이후 '북학'이라는 학문이 조선에서 하나의 시대 사상으로서 자리잡는 기반이 되었다. 박제가 말고도 박지원, 홍대용, 이덕무 등 '북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 그룹들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들은 청 사행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폐쇄적인 사회의 문을 열어 이용후생을 통한 백성들의 생활 안정과 부국을 외쳤다. 건축 자재로서 벽돌을 사용할 것과 교통 수단으로서 수레와 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자는 것, 비활동적이었던 한복을 개량하고 대외 무역을 확대하자는 이들의 사상 배경에는 당시 사농공상으로 서열화되어 있던 직업의 귀천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상공업을 진흥시키자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박제가는 지나치게 중국 문명을 찬양한 나머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에 가장 선구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균형 감각을 규지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네 차례에 걸친 중국 사행 이후 박제가는 중국에 대한 선망이 지나쳐 그만 조선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북학의》곳곳에는 중국 문화에 대한 칭찬과 함께 우리 것에 대한 불만이 가득 나열되어 있는데, 중국의 선진문화를 수용하지 못하면 '보잘것없는' 조선은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논리로까지 비약된다. 더욱이 "본래 사용하는 우리 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써야만 '오랑캐'라 불리는 신세를 면할 수 있다"<ref>《북학의》한어편.</ref>고까지 외치는 대목에서는 '북학의 선구자'로서뿐 아니라 '극단적인 중국 신봉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기에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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