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턴 기사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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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은 점령한 영토를 교회에 봉헌하고 곳곳에 성채를 세워 군사적·경제적 중심지로 만들었다. 독일 중부 지방에서 농민들을 이주시켜 이 지역에서 살게 했으며 폴란드와 독일의 귀족들을 자신들의 가신으로 끌어들여 기사단의 지배를 더욱 확실히 하였다. 특히 교황청에서 기사들이 이윤을 추구할 수 있도록 허락하자 기사단은 이 지역의 무역을 독점하여 더욱 강력해졌다.
 
튜튼 기사단은 [[1237년]], 리보니아(LovoniaLivonia)의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을 흡수하고 프로이센에서 [[에스토니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했다. 이후 [[러시아 정교회]] 지역을 [[로마 카톨릭교]]로 개종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1242년]] [[노브고르드]]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에게 패배하여 좌절되었다.
 
[[1291년]] [[예루살렘 왕국]]이 아크레에서 멸망하자 튜튼 기사단은 이교를 신봉하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기사단과 리투아니아 이교도들과의 전투는 항상 처절했다. 그러나 기사단은 리투아니아를 완전히 복속하지는 못하였다. 기사단장 빈리히 폰 크니프로드(Winrich von Kniprode [[1310년|1310]]-[[1382년|82]]) 시절([[1351년|1351]]-[[1382년|82]]), 튜튼 기사단은 그 최대 판도를 맞게 되는데 그 영토가 [[발트 해]] 연안의 [[쿠를란트]], 리보니아, [[에스토니아]]와 폴란드 단치히 지역, 동포메른 지방 및 독일의 중남부지역, 리투아니아의 사모기티아 등에 이르러 북부 유럽의 최강의 세력으로 등장했다.
 
[[파일:Teutonic state 1455.png|thumb|200px|<small>튜튼 기사단령([[1308년]]-[[1455년]])</small>]]
14세기에 들어와서 기사단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연합군의 위협을 받았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요가일라 (Jagiello)대공은 튜튼 기사단 때문에 발트 해로 진출하지 못하고 있던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로마 가톨릭교회를 받아들이는 한편, 폴란드의 여왕과 결혼하였다. 폴란드와 힘을 합친 리투아니아는 [[1410년]] [[타넨베르크 전투 (1410년)|그룬발트 전투]]에서 튜턴 기사단을 대패시켰다. 이 전투 이후 기사단은 사모기티아 북서부를 빼앗기고 점차 그 세력을 상실하였고 이후 [[30년 전쟁]]으로 더욱 영향력을 잃고 결국 폴란드 점령지역 대부분도 상실하였다. 이 때부터 기사단은 폴란드 사람도 기사단으로 받아들여야 했으며 독립적인 지위를 잃고 폴란드 왕의 봉신이 되었다.
 
[[1525년]] 기사단장 알베르트는 폴란드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루터교]]로 개종하면서 프로이센의 영토를 상실했다. 이후에도 리보니아와 [[신성 로마 제국]]에 몇몇 영토가 남아 있었으나 곧 리보니아도 잃고 말았다 이후에도 계속 몇몇 기사단령이 남아있었지만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완전히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