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언론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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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를 주관하였다. [[1947년]]부터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그뒤 5.10 단독 총선거에 찬성하였다.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1947년]] 범우파정당 통합에 지지하였으나 [[장덕수]]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1954년]]의 호헌동지회에서 신당을 조직할 때에는 [[조봉암]]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사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하는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되었으나, 유족 등 관련단체에서는 반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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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활동 ====
[[File:Kim Seong-Soo 1950.jpg|썸네일|130px|left|인촌 김성수]]
[[파일:3731124494 a20ba4f3 c1-2.jpg|썸네일|140px|right|1950년 3월에 개정되어 공포된 [[농지개혁]]법안.]]
김성수는 자신과 [[한민당]]원 전 의원이 이범석의 총리인준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각료 8석을 요구했다. 이범석은 당시 12개 부와 4개 처의 조직에서 장관 8석은 지나친 요구라고 했으나, 곧 김성수의 제의를 수용하였다.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국방부장관 직을 겸하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이승만]]에게 한민당에서 지명한 인물을 천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이 생각해둔 인사가 있다 하여 그의 부탁을 받은 [[이범석 (1900년)|이범석]]의 8명 중 3명만을 입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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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playcultur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8/2008080800505.html 조선 유력인사 5명 美 인물평가 내용] 조선일보 2008.08.08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긴급입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
*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795 “동아 김성수·조선 방응모는 ‘친일인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밝혀] 한국기자협회 2009년 11월 09일 (월)
* [http://news.donga.com/People/Inmul/3/060007/20100707/29689803/1 인촌 김성수 선생이 일제강점기 1926년 ‘인도 독립의 횃불’ 간디에게 보낸 편지 발견] 동아일보 2010년 07월 07일자
=== 관련 서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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