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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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대한민국의 사적|사적]]
|그림=
|이름=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br/>(北漢山新羅 眞興王 巡狩碑址)
|지정_번호=228호
|지정연월일=1972-07-24
|소재지=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 산 3
|제작_시기=[[신라시대]]
|비고=
}}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北漢山新羅 眞興王 巡狩碑址)는 신라시대 북한산 순수비가 있던 터로, 사적 제228호이다.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遺址)는 신라시대 북한산 순수비가 있던 터로, 사적 제228호이다.
 
 
==개요==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는진흥왕 순수비지는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가 있던 자리이다. 원래의 비(국보 제3호)는 풍화가 심하여 1972년에 경복궁 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놓고, 본 위치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표석이 세워져 있다.
 
신라는 진흥왕 때 삼국 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어 한반도 전체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였다. 진흥왕은 재위 12년(551)에 백제와 손잡고 당시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죽령(竹嶺) 이북의 한강 상류로 진격하여 이곳에 10여개의 군(郡)을 설치하였고, 여세를 몰아 14년(553)에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광주(廣州)지방을 그 치소(治所)로 삼으면서부터 신라는 현재의 서울 지역을 북방 경영의 군사적 거점으로 삼아 삼국통일의 기반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진흥왕은 16년(555) 10월 북한산을 순행하여 강역(疆域)을 확정하였고, 11월에는 돌아오는 길에 통과한 여러 고을에 1년간의 세금을 면제해 주는 한편 특별사면을 베풀어 사형수 이하의 죄수들을 석방하도록 조처했는데, 북한산순수비는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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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비는 건립 후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왕심비(枉尋碑) 혹은 글자가 없는 소위 몰자비(沒字碑)로 알려져 오다가, 19세기 초 김정희(金正喜)가 승가사에 들렀다가 이곳에 찾아와 이끼로 뒤덮인 비면을 닦아내고 판독함으로써 진흥왕순수비임이 알려졌었다. 진흥왕순수비는 북한산비 이외에도 마운령비(摩雲嶺碑), 황초령비(黃草嶺碑), 창녕비(昌寧碑)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화재}}
{{서울시공개자료}}
 
 
[[분류:서울특별시의 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