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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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06년에 데메트리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살라미스 해전 (키프로스, 기원전 306년)|살라미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형제인 [[메넬라오스 (라고스의 아들)|메넬라오스]]를 무찔러 이집트의 해군력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기원전 305년, 이제 부왕을 승계하여 왕위에 오른 데메트리오스는 자신의 대의를 저버렸다며 [[로도스]]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새로운 [[공성 무기]]를 고안해내는 재능이 있던 그는 로도스의 도읍을 공격하다 실패하였으나 이 일로 '폴리오르케테스'란 칭호를 얻었다. 그가 만든 발명품 가운데는 작동하기 위해 1,000명이 필요한 높이 55m의 [[공성 망치]]와 높이 38m, 폭 18m, 무게 360,000 파운드에 달하는 [[공성 탑]] "[[헬레폴리스]]"("도시 함락자")가 있었다.
 
기원전 302년에 해방자로써 두 번째로 그리스를 방문하여 코린토스 동맹을 복구하였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의 방탕함과 사치 때문에 아테나이 사람들은 카산드로스의 지배를 그리워하게 되버렸다되어버렸다. 그가 범한 악행 가운데 미남 데모클레스라는 젊은 소년에게 구애한 사건이 있었다. 이 젊은이는 왕의 애정을 계속 거부하였으나, 어느 날 목욕탕에 갇히게 되었다. 빠져나갈 수도, 왕에게 저항할 수도 없었던 그는 뜨거운 물이 끓은 솥에 뚜껑을 열고 뛰어들고 말았다. 데모클레스의 죽음은 소년 자신과 조국 아테나이의 명예를 표상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 한 번은 데메트리오스가 어느 시민의 벌금 50 탈란톤을 면제하는 대신 그의 아들 클레아이네토스가 몸을 바치도록 요구하기도 하였다.<ref>[[플루타르코스]], '데메트리오스' 열전</ref> 또 데메트리오스는 그리스인 고급 창부 라미아의 관심을 얻으려 하였다. 라미아는 250 탈란톤을 요구하였는데, 왕은 이 돈을 모으기 위해 비누에 세금을 매겼다.<ref>David Wallechinsky, ''The People's Almanac Presents the Book of Lists'', New York : Bantam Doubleday Dell, 1978, isbn 0553111507, 328쪽.</ref>
 
데메트리오스 역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디아도코이|후계자들]]의 견제를 받았는데, 셀레우코스와 카산드로스, 뤼시마코스는 데메트리오스와 부왕을 멸망시키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301년에 [[프뤼기아]]의 [[입소스 전투|입소스]]에서 두 군대가 전투를 벌였다. 안티고노스는 전사하였으며, 데메트리오스는 심한 손실을 입고 [[에페소스]]로 후퇴하였다. 전황이 뒤집히면서 그의 여러 적들이 들끓었는데, 아테나이 사람들은 심지어 데메트리오스가 자신들의 도성에 진입하는 것도 거부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뤼시마코스의 영토를 유린하였으며, 셀레우코스와 화의를 맺어 셀레우코스의 딸 [[시리아의 스트라토니케|스트라토니케]]와 혼인하였다. 이때 아테나이는 기원전 296년에 아테나이에서 집권한 민중 지도자 [[라카레스]]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데메트리오스는 오랜 포위 끝에 도시를 함락하였으며,(기원전 294년) 301년에 아테나이 사람들의 저지른 잘못을 용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