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중화민국 관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949년 1월 4일, 중화민국은 — 중국공산당과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에서도 —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대한민국 정부를 정식 승인하였다. 같은 날, 주한 중화민국 대사관이 [[서울 중구]] [[명동]]에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특사관 선발대는 호텔에 묵으면서 특사관 자리를 물색하려 했던 당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그들이 마련해 준 비행기에 "대한민국 특사관"이란 간판을 싣고 1949년 4월, 다음의 피난 수도인[[ 광저우]]로 떠났다. 그후 이틀이 지나 난징은 함락(4월 23일)되었다. <ref name="비록한국외교27">{{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14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14&officeId=00032&pageNo=4&printNo=9066&publishType=00020| 제목 = 秘錄 韓國外交<27> : 政府樹立 직후 ⑨ 飛行機에 懸板싣고| 작성일자 = 1975-3-14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난징에 주재하고 있던 36개국의 외교사절 가운데 절반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원해 그대로 난징에 남고, 광저우까지 피난온 대사들은 미국, 영국, 필리핀, 한국 등 18개국 뿐이었다. 이들은 중화민국 정부가 마련해준 광저우에서 가장 큰 13층의 호텔, 군애반점(群愛飯店)에 임시사무실을 차렸다. 또 한국 공관은 난징을 떠난 광저우로 피난하기 전 이정방 참사관을 [[상하이]]로 차출했기 때문에 최문경 1등서기관이 대리 대사를 맡게 되었다. 당시 상하이에는 총영사 [[신국권]](申國權)이 있었으나 공산군이 밀어닥치자 타이완으로 피난해 버렸기 때문에 대한민국 본국에서는 베이징의 연경대학 출신으로 중국어에 능통한 이정방 참사관을 상하이에 파견, 교포들의 피난을 돕도록 했던 것이다. 그 후 이정방은 중공군 점령하에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미국대사관의 협조로 귀국하여 이승만으로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교포송환을 끝낸 용기가 가상하다고 표창을 받은 뒤 곧 홍콩 총영사로 승진하였다. <ref name="비록한국외교27"/> 광저우로 옮긴 한국 공관은 본국 정부와의 통신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따라서 최 대리대사와 한유동이 교대로 총영사관이 있는 홍콩(김용식 총영사)으로 출장을 다니며 본국과 연락을 취했다.
 
1949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은 주중 특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신석우 (1894년)|신석우]](申錫雨)를 초대 주중화민국 대사로 임명하였다. <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12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12&officeId=00032&pageNo=4&printNo=9064&publishType=00020 | 제목 = 秘錄 韓國外交<26> : 政府樹立 직후 ⑧ 美中國에 特使館| 작성일자 = 1975-3-12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49년 8월 26일, 신 대사는, 타이완에 피난 중인 장제스를 대신하여 [[리쭝런|이종인(李宗仁)]] 부총통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게 되었다. 최 대리 대사는 서울에서 주한 중국 소(邵毓麟) 대사의 환영이 대단했으므로 중화민국 외교부도 그렇게 답례를 해 주도록 외교부 의전실에 특별히 당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 대사를 마중나온 사람은 의전실장격인 외빈실장 뿐이었고 이 부총통에 대한 신임장을 제정했을 때도 조촐한 의식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최 대리대사는 외교부 외빈실장을 찾아가 책상을 두드리며 항의를 하기도 했다. " 왕(王)실장, 우리나라에서는 군악대와 의장대를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환영해 주었는데 이렇게 푸대접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최대사, 중국은 미국이나 영국이나 어느 나라 대사든 똑같이 의전대로 형식을 갖추고 있소. 그러나 당신네 나라는 무엇입니까. 무초 주한 미대사에 대한 환영에 비하면 우리 소 대사는 얼마나 푸대접을 받은 것입니까. 그런 차별대우가 더욱 곤란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지 얼마후 신 대사는 장제스 총통이 있는 곳에서라야 외교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최문경과 함께 타이페이로 갔다. 타이페이에서 신 대사는 장제스를 만나 난징과 광저우에서 중화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공관에 베풀어준 배려에 대해 사의를 표하자 장제스는 신 대사의 손을 꽉잡고 "우리는 형제와 같은 국가이므로 곤경에서 더욱 이해하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 대사와 최문경이 중국 정부의 쌍십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광저우로 갔을 때 전황은 더욱 긴박하여 모두들 피난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래서 신 대사와 최문경은 다시 홍콩 총영사관으로 철수하고 한유동만 남아 공관 살림을 옮기기 시작했다. <ref name="비록한국외교27"/>
 
=== 정상 회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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