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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세이라는 말 자체는 [[에도 시대]]의 라이 산요(賴山陽)가 《[[일본외사|니혼가이시(日本外史)]]》에 이러한 정치 형태를 '세이사죠코(政左上皇)'로서 '인세이(院政)'를 행했다고 표현하였고, 메이지 시대에 편찬된 《구니시간(國史眼)》에 이를 참고로 하여 인세이라고 표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인세이를 하는 상황은 치천(治天)의 군(君)이라고 불렸다.
 
== 개요 ==
=== 등장 전사(前史) ==
국왕이 아직 정치를 돌볼 여력이 있는 시점에서 정계에서 물러나 다음 국왕이 된 어린 아들(또는 손자)의 후견인이 되는 형태의 정치는 이미 고대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그 사례를 엿볼 수 있다. 전왕이 후왕의 정치를 후견한다는 개념에서 '인세이'의 뼈대는 이미 [[지토 천황|지토(持通) 천황]]ㆍ[[겐메이 천황|겐메이(元明) 천황]]ㆍ[[쇼무 천황|쇼무(聖武) 천황]]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다. 그 무렵에는 아직 일본의 왕위 계승이 안정되지 못했으므로, 천황이 '양위'라는 의사 표시를 통해 자신이 천황으로 세우고 싶은 태자에게 황위를 잇게 하고자 선택한 방법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대왕이 양위한 최초의 사례는 [[고교쿠 천황|고교쿠(皇極) 천황]]이다.(그 전까지 왕위는 이른바 '종신제'로서 대왕의 죽음에 따라서만 행해졌다)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는 [[사가 천황]]이나 [[우다 천황]], [[엔유 천황]] 등이 '양위'를 행했다. 이러한 천황은 퇴위한 뒤에도 '천황가의 최고 웃어른'으로서 어린 천황을 후견한다는 형태로 국정에 관여하기도 했다.<ref>이를테면 우다 천황은 다이고 천황에게 양위한 뒤 병이 든 천황 대신, 법황으로서 실질상의 '인세이'를 실시했음이 밝혀졌으며, 엔유 천황은 퇴위 뒤 아들의 이치조 천황의 정무에 간여하는 문제를 두고 당시의 셋쇼 후지와라노 가네이에와 대립하고 있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ref>(상왕은 정치에 간여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고대 일본의 율령은 양위한 천황, 즉 상황을 천황과 동등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변칙적인 형태마저도 '제도'의 이름으로 허용되었다) 때문에 인세이라는 정치형태가 흔히 알려진 것보다 더 오래 전부터 이미 등장했다고 보는 견해가 가마쿠라 시대 이후부터 존재했다.<ref>대표적인 것이 《구칸쇼》나 《진노쇼토키》, 에도 시대의 국학자 아라이 하쿠세키의 《독사여론》 등이다.</ref> 하지만 당시까지는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인 조직이나 재정적ㆍ군사적 뒷받침이 부족했던 데다 헤이안 중기 이후로는 천황이 어린 나이에 단명하는 경우가 많아, 천황의 아버지이자 천황가의 최고 '웃어른'으로서 지도력을 발휘할 젊음과 건강을 제대로 유지한 상황이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부계인 천황가의 힘이 쇠약해진 대신 모계 즉 황후의 아버지로서 천황가의 외척인 후지와라(藤原) 홋케(北家) 집안이 '천황의 외조부'의 자격을 빌어 천황의 직무와 권리를 대리하고 대행하는 형태의 셋칸정치가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생긴 것은 11세기 중엽에 [[고산조 천황]]이 즉위하면서부터였다. 헤이안 시대를 통틀어 가장 큰 정치 과제는 황위계승의 안정이었다. 황통을 [[이치조 천황]] 계통으로 통일한다는 흐름 속에서 지랴쿠(治曆) 4년([[1068년]]) 즉위한 고산죠 천황은 우다 천황 이래 후지와라 홋케(셋칸케)를 외척으로 두지 않은 170년 만의 천황이었고, 이것은 천황의 외척이라는 지위에 의지하고 있던 셋칸정치를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고산조 천황 이전에도 왕권의 확립과 율령제의 부활을 꾀하며 이른바 '신정(新政)'이라는 이름의 일련의 정책들을 제시하고 추진한 천황은 많이 있었지만, 특히 고산죠 천황은 외척에게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강점을 바탕으로 엔규(延久)의 장원 정리령([[1069년]]) 같은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나갔다. 고산조 천황은 엔규 4년([[1072년]])에 제1황자 사다히토 친왕(훗날의 [[시라카와 천황]])에게 양위한 직후 당뇨병으로 붕어했는데, 고산조 천황이 사다히토 친왕의 뒤에서 인세이라 불릴 상왕정치를 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견해가 이미 가마쿠라 시대 이후의 《구칸쇼》나 《진노쇼토키》에서 제기되고는 있지만 오늘날에는 이것이 인세이 자체보다는 고산조 천황 자신의 왕권 강화를 통한 셋칸 정치로의 회귀를 저지하고, 황위 결정권을 장악하는 정도에 그쳤다고 보는 반론도 제시되고 있다.
 
== 시라카와 천황과 인세이의 시작 ==
고산조 천황과 마찬가지로 시라카와 천황도, 그 생모가 셋칸케가 아닌 한인류(閑院流) 소생으로서 츄나곤 후지와라노 기미나리(藤原公成)의 딸이자 춘궁대부 후지와라노 요시노부(藤原能信)의 양녀인 뇨고(女御) 시게코(茂子)였는데, 간파쿠를 그대로 둔 채로 고산조 천황처럼 친정을 행했다. 천황은 [[오토쿠|오토쿠(應德)]] 3년([[1086년]])에 당시 여덟 살에 불과했던 요시히토(善仁) 친왕([[호리카와 천황]])에게 양위하고 타이죠덴노(太上天皇)이 되었는데, 어린 주상의 후견으로서 시라카와인(白河院)이라 칭하며 양위하기 전처럼 계속 정무를 살폈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인세이의 시작으로 본다. [[가조|가조(嘉承)]] 2년([[1107년]])에 호리카와 천황이 죽고 네 살에 불과한 황태자가 즉위하면서([[도바 천황]]), 다소나마 정책 수립 및 결정에 천황의 독자성이 있었던 호리카와 천황 때보다 더 확실하게 인세이는 강화되었다. 시라카와인 이후 인세이를 행했던 상황들은 모두 '치천의 군', 즉 사실상의 군주로서 군림했고 이 시기 천황은 동궁(황태자)에 불과한 신세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시라카와 천황이 당초부터 그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인세이의 체제를 의도한 것은 아니다. 흐름이 '결과적으로' 그렇게 흘러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라카와 천황의 본뜻은 황위 계승의 안정화(라기보다도 자신의 계통에게 황위를 독점시키는 것)에 있었다. 동생 사네히토 친왕ㆍ스케히토 친왕이 유력한 황위계승 후보로 존재하고 있는 와중에, 자신의 자식인 요시히토 친왕에게 양위함으로서 동생의 황위 계승(나아가 그것을 지지하는 귀족)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사사키 무네오(佐々木宗雄)의 연구에 따르면 《츄유키(中右記)》 같은 당시 구교들의 일기에 기록된 조정에서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시라카와 덴노가 어느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정계의 판단자로서 활약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처음 '인세이'를 시작했을 때에는 셋쇼인 후지와라노 모로자네와 상담하며 정책을 수행하고, 호리카와 천황이 원복한 뒤에는 천황과 간파쿠 후지와라노 모로미치가 협의해 정책을 펼치면서 시라카와 상황과는 상담도 하지 않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오랜 기간에 걸친 셋칸정치의 결과, 국정에 관한 정보가 셋칸에게 집중된 구조로 조정의 구도가 움직였고 따라서 국정 정보를 독점하고 있던 셋칸의 정치력은 상황이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지와라노 모로미치의 갑작스러운 급서로 상황이 바뀐다. 모로미치의 뒤를 이은 후지와라노 다다자네는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고, 이는 셋칸의 정치력 저하와 셋칸케에 의한 국정 정보의 독과점을 붕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천황은 점차 타다자네보다 아버지 시라카와 상황에게 정치를 상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기다 호리카와 천황도 붕어하고 또다시 어린 천황이 즉위하면서 결과적으로 시라카와인에 의한 권력 집중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한편 히구치 켄타로는 시라카와 법황의 인세이의 전제로서 황태후 조토몬인(上東門院) 아키코(彰子, 후지와라노 아키코)의 존재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자신의 소생인 고이치조 천황을 황태후의 입장에서 지지한 이래 그녀는 시라카와 덴노의 대까지 5대에 걸쳐 천황가의 웃어른과 같은 존재로 군림했다. 천황의 대리인 셋쇼도 자신의 임면을 천황의 칙허로 행하지 못했고(그러면 결과적으로 셋쇼 자신이 직접 자신의 진퇴를 판단하는 모순 상태에 빠지므로), 셋칸케의 전성기를 쌓아올렸다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ㆍ요리미치 부자의 셋쇼 임면조차도 그녀의 영지를 받고서야 이루어졌다. 후지와라노 모로자네는 자신의 권위를 부여하고자 자신의 셋칸의 임면에 미치나가의 선례를 모방해 시라카와 상황이 관여해줄 것을 요구했고, 천황 재위 중의 협조 관계뿐 아니라 상황의 행차에 구교를 동원한다거나 인노고쇼(院御所)를 짓는 데에 여러 쿠니에 세금을 매기는 등 그 권한 강화에 적극 협력했다. 시라카와 상황도 인쵸(院廳)의 인사권은 모로미치에게 일임하는 등 그를 국정의 주도자로서 인정해주는 정책을 채택해 왔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모로미치ㆍ모로자네가 급서하는 바람에 모로자네가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자 고의로 떠받들었던 시라카와 상황(법황)의 권위며 조토몬인의 선례를 근거로 한 시라카와 상황(법황)의 셋칸 임명에 관한 인사권 관여 등, 그의 모든 노력이 결과적으로 후지와라노 다다자네의 셋쇼 임명을 시작으로 하는 '치천의 군'에 따른 셋칸 임명을 정당화시켜버렸다. 셋칸을 상황이 지목하게 된 것이다. 부계 직계에 의한 황위계승은 그 황위를 이어받을 '남자'를 반드시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황통이 자칫 단절될 위험이 있고, 거꾸로 많은 황자가 있어도 그들에 의한 황위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인세이에서는 '치천의 군'이 차기 혹은 그 차기 천황을 지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안정된 황위계승을 실현할 수 있었고, 황위 계승에 '치천의 군'의 뜻을 반영시킬 수도 있었다. 또한 외척 관계를 매개로 한 셋쇼 칸파쿠와는 달리 인세이는 천황의 친아버지라는 직접적인 부계 혈연에 근거한 것이었기에 전제적인 통치가 가능했다.
 
인세이를 행하는 상황은 자기의 정무 기관으로서 인쵸를 두고 인센(院宣)ㆍ인쵸하문(院廳下文) 등의 명령문서를 발급했는데, 기존의 학설에서는 인쵸에서 조정의 모든 실제 정무가 이관되다시피 하여 이루어졌다고 여겨졌지만 근래에는 '비공식 사문서'로서의 측면이 있는 상황의 인센을 통해 인쵸에서 조정에 압력을 가하고, '인의 근신(近臣)'이라고 불리던 상황의 측근을 태정관에 파견함으로서 실질상 지휘를 맡았다는 견해가 유력해지고 있다. 이들 '인의 근신'은 상황과의 개인적인 주종 관계에 따라 출세하여 권세를 떨쳤다. 또한 상황 자신의 독자적인 군사 조직으로서 '북면의 무사'를 두는 등, 헤이시 중심의 무사 세력 등용을 도모하여 헤이시 권력의 성장을 재촉했다. 때문에 시라카와 상황에 의한 인세이 실시를 일본 역사의 '중세'로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비유 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