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라노 시게모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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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겐의 난, 헤이지의 난===
 
[[호엔|호엔(保延)]] 4년([[1138년]]), 기요모리의 장남으로맏아들로 탄생. 모친은어머니는 우콘노쇼칸(右近監) 다카시나노 모토아키(高階基章)의 딸. [[규안|규안(久安)]] 6년([[1150년]]) 12월,12월에 [[도바 천황|도바 법황(鳥羽) 법황(法皇)]]의 쿠란도(蔵人)로 임명되었다. 다음해 정월에 종5위하가 되었다.
 
[[호겐|호겐(保元)]] 원년(1156년)의 [[호겐의 난]]에 아버지 기요모리를 따라 참전했다. 《헤이한키(兵範記)》에는 「나카쓰카사쇼(中務少輔) 시게모리」로 기록되어 있다. 상황측의 무사로서 당시 '강궁(强弓)'이라 불리던 미나모토노 다메토모(源爲朝)와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기요모리가 퇴각을 지시했을 때, 시게모리는 아버지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다메토모와 싸우기 위해 출진하려고 하는 등 혈기왕성한 모습을 보였다. 호겐의 난은 기요모리가 속한 천황 측의 승리로 끝났고, 호겐 2년([[1157년]]) 정월, 시게모리는 그 공적으로 종5위상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2일에는 대내리(大內裏, 황궁)의 지쥬덴(仁壽殿)을 조영하는데 공을 세운 아버지 기요모리를 대신해 정5위하가 되었다. 그의 나이 19세 때의 일이었다. 호겐 3년([[1158년]]) 8월, 기요모리의 부임지는 [[아키노쿠니|아키(安芸)]]에서 [[도토미 국|도토미(遠江)]]로 옮겨졌는데, 기요모리 자신이 이미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貳)을 맡고 있었던 관계로 대신 시게모리가 도토미노카미(遠江守)를 맡게 되었다.
 
[[헤이지|헤이지(平治)]] 원년([[1159년]]) 12월 9일에 헤이지의 난이 발발하였을 때, 기요모리는 구마노(熊野) 참배를 위해 [[기이 국|기이(紀伊)]]에 있었다. 《헤이지모노가타리(平治物語)》에서는 시게모리가 동요하는 부친 기요모리를 격려했다고 하나, 《구칸쇼(愚管抄)》에 따르면 기요모리와 함께 있던 것은 아우 모토모리(基盛, 시게모리의 친동생)와 무네모리(宗盛) 형제 그리고 15인의 무사들 뿐으로 시게모리는 동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교토에 돌아온 기요모리는 [[니조 천황|니조(二條) 천황]]을 황궁에서 로쿠하라로 탈출시키고, 난을 일으킨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賴)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를 토벌하라는 선지를 받았다. 이때 시게모리는 숙부 요리모리(賴盛)와 함께 출진하였다. 이 전투에서 시게모리는 "연호는 헤이지(平治), 도읍은 헤이안(平安), 우리는 헤이시(平氏), 셋 다 똑같이 '헤이(平)'이니 적은 틀림없이 평정(平定)될 것이다!"라 외치며 아군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헤이지모노가타리》에는 시게모리가 요시토모의 맏아들인 요시히라(義平)와 고쇼(御所, 여기서는 다이리(内裏)를 가리킴)의황궁의 자신전(紫宸殿) 정원에 있는 귤나무와 벚나무 사이에서 요시토모의 맏아들인 요시히라(義平)와 격전을 벌였고, 호리카와(堀河)의 싸움에서는 타고 있던 말이 화살을 맞자 그 즉시 목재더미 위에 서서 새로운 말로 갈아 타는 등 마치 사자처럼 분전했다고 읊고 있는데, 《구칸쇼》에는 요시토모는 즉시 고쇼에서 나와서 로쿠하라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실제 고쇼에서 전투가 벌어졌는지 어떤지는 확실하지 않고 다만 이야기를 위한 창작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 전투에서 후지와라노 나리치카는 노부요리에게 가담하고서도 목숨을 건졌는데, 나리치카의 동생 쓰네코가 시게모리의 아내였던 관계로 그의 탄원에 의한 것이었다고 추정된다. 난이 끝난 뒤에 시게모리는 훈공에 대한 상으로 이요노카미(伊予守)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곧 종4위하에 사바노카미(左馬頭)도 겸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