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라노 시게모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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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코노에다이쇼, 나이다이진 취임===
 
[[죠안]]조안 (연호)|조안(承安)]] 원년([[1171년]]) 12월, 기요모리의 딸 도쿠코가 다카쿠라 천황의 비로 입궁하는입궁한 것을 계기로 시게모리는 곤다이나곤으로곤노다이나곤으로 복귀했다. 복귀 후의 시게모리는 조정의 공사에 정력적으로 임했다. 죠안조안 3년([[1173년]]) 4월, 호쥬지덴(法住寺殿)의 가야고쇼(萱御所) 화재 때는 가장 먼저 달려가 소화 활동을 하여, 고시라카와 상황으로부터법황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같은 해 겨울 일어난 [[나라|난도(南都)]](奈良) 승도들의 시위(強訴)에강소에서는 대해서는일족인 일족 다이라다이라노 사다요시(平貞能)를 우지(宇治)에 파견하여파견해 방비를 맡겼다. 죠안조안 4년([[1174년]]) 7월, 시게모리는 공석이 된 우코노에다이쇼(右近衛大)에 임명된다. 이 임명에 대한 기요모리의 기쁨은 대단해서 21일의 하례 의식에는 구니쓰나 이하 공경구교 10인과 당상관덴죠비토(殿上人) 27인이 수행하였다.
 
[[안겐]]|안겐(安元)]] 2년([[1176년]]) 정월, 고시라카와 법황의 50세 축하연에는 시게모리도 헤이시 일문의 필두로필두로서 출석, 헤이시와 법황의 밀월 관계를 드러냈다. 5월에 시게모리는 다시 해적 토벌의 교지를 받는다. 그러나, 7월에 겐슌몬인의 사망으로 헤이시와 고시라카와 법황의 대립이 점점 현저해진다.표면에 그래도드러나기 다음해시작한다. 정월에는이듬해 시게모리가정월 시게모리는 사코노에다이쇼, 무네모리가무네모리는 우코노에다이쇼에 임명되어임명되면서, 양 다이쇼(大)직을 헤이시가 독점하게 되었다. 3월에는 [[후지와라후지와라노 모로나가]](藤原師長)가 다죠다이진[[태정대신|태정대신(太政大臣)]]되어서되면서 공석이 된 나이다이진(內大臣)에 시게모리가 임명되었다. 고시라카와 법황도 후쿠하라를 방문하는 등, 표면적으로는 별일 없이 평온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안겐의 강소와 시시가타니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