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만 (언론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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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2월]] [[중앙고등학교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 [[1933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예과를 수료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대학교]] 정경대학(School of Economics & Political Science)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1936년 영국 런던대학교 수료 이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1940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으며, [[1985년]] [[일본]] [[와세다대학]]으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동아일보]] 이사로 언론계에 투신한 이래 45년간 동아일보사의 실질적인 사주(社主)로서 군사정권과 맞서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였으며, 그가 재임하는 동안 ≪동아일보≫의동아일보의 사세가 신장되었다. 아버지 인촌의 사후 그는 사촌형인 [[고재욱 (1903년)|고재욱]]과 상의하여 회사를 경영해 나갔다. 이후 점차적으로 그는 막후에서 영향력과 실력을 행사하였다.
 
[[1955년]] 재단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에 선출되었다. 1955년 [[동아일보]]사 상무, 1961년 전무이사 겸 발행인을 거쳐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1963년 4월 25일에는 동아방송(DBS)을 개국하였고, 일간 ≪소년동아≫(1964.7.)를 창간하였으며, 일제하에 발행되다가 폐간된 월간 ≪신동아≫신동아(1964.9.), ≪여성동아≫여성동아(1967.11.) 복간하였다등의 잡지를를 재발간하였다. [[1966년]] [[동아일보]] 부사장 겸 발행인으로 재임 중, ≪신동아≫신동아 필화사건이 일어나 발행인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1971년]] [[8월]]에는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1974년에는 동아일보사 기자와 동아방송 프로듀서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회사측과의 갈등이 심화 대립되는 상태가 벌어졌는데, 이 해 말부터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동아일보≫와 모든 자매지에 대한 광고 탄압을 자행하여 안팎으로 커다란 시련을 겪었다. 그 와중에서 기자와 방송 프로듀서들에 대한 집단해고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으나 김상만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한 공로로 국제신문발행인협회(FIEJ)의 1975년도 ‘자유의 금펜상(Golden Pen of Freedom)’을 받았다. 이어서 1977년 [[동아일보]]사 대표이사 회장, [[1981년]] [[동아일보]]사 명예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정권의 탄압에서 해고된 직원들의 처우를 외면하여 후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1978~1986년 국제언론인협회(IPI) 본부이사를 지냈다. [[1982년]] 재단법인 [[고려중앙재단]] 이사장에 선임되고 1983년 한영수교 100주년기념사업위원장, 1984년 신문인협회 고문, 1986년 IPI 종신명예회원에 선임되었다.
 
=== 기타 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