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작곡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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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경상남도]] [[진주시|진주]] 출신이다.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1938년]] 경부터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박향림]]이 부른 〈항구에서 항구로〉로 작곡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30년대 후반에 다섯 군데의 음반회사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태평레코드]]가 가장 규모가 작았다. 그러나 이 무렵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남인수]]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가수로 [[백년설]]의 노래가 크게 사랑받으며 태평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이재호는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대지의 항구〉를 [[1940년]]과 [[1941년]]에 백년설을 통해 발표하여 대히트를 기록함으로써 태평의 기둥 역할을 했다. 이 노래들은 모두 지금까지도 널리 불리고 있다.
 
백년설 외에도 [[백난아]]와 [[진방남]]이 이재호의 곡을 받아 불러서 인기를 모았다. 이재호는 작곡, 편곡, 연주 실력을 고루 갖추고 있어 천재적인 음악성의 소유자라는 격찬을 받았다. '가요계의 [[슈베르트]]'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오케레코드]]가 [[박시춘]]과 남인수 콤비의 히트곡을 계속 배출하는 동안 태평은 이재호와 백년설 콤비로 이에 맞섰다. 후에 진방남은 작사가로 활동하며 이재호와 짝을 이루어 많은 노래를 발표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의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군국가요 작곡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ref>{{뉴스 인용
|저자=이준희
|제목='가수이자 작사가 진방남의 음악 인생 -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다시 보기 (39)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83578
|출판사=오마이뉴스
|작성일자=2004-04-21
|확인일자=2008-05-17
}}</ref><ref>{{뉴스 인용
|저자=이준희
|제목='나그네설움' 작곡자 이재호의 굴곡인생 -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다시 보기 (40)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83578
|출판사=오마이뉴스
|작성일자=2004-04-28
|확인일자=2008-05-17
}}</ref> 이재호가 이 시기에 작곡한 노래는 〈소년초〉 , 〈결전 태평양〉, 〈일억 총진군〉, 〈국경선 보초병〉, 〈달 있는 모항〉, 〈천리 전장〉, 〈전선의 달〉 등이다. 작사에는 태평의 문예부장을 지낸 [[박영호 (극작가)|박영호]]와 연극인 [[박향민]] 등이 참가했고, 노래는 [[이인권 (1919년)|이인권]], 진방남 등이 불렀다. 이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광복 직후에도 〈꽃마차〉, 〈귀국선〉 등 이른바 해방가요를 작곡해 계속 인기를 누렸으며, 고향 진주로 내려가 모교인 진주중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근무했다. 이때 가르친 제자가 작곡가 [[이봉조]]이다. [[한국 전쟁]] 후에는 태평 3인방이던 진방남, 백년설과 함께 [[서라벌레코드]]를 창립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앓아온 [[폐결핵]]으로 1960년에 40대 초반의 나이로 사망했다. 폐 한 쪽을 잘라내는 수술을 하는 등 투병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고향에 찾아와도〉, 〈경상도 아가씨〉, 〈산유화〉, 〈물방아 도는 내력〉, 〈홍콩아가씨〉, 〈아네모네 탄식〉, 〈무정열차〉, 〈[[단장의 미아리고개]]〉, 〈울어라 기타줄아〉, 〈산장의 여인〉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1952년]]에 남인수가 노래한 〈산유화〉는 완성도 높은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손목인]]으로부터 시작하여 [[박시춘]]에까지 이르는 일제 강점기 인기 작곡가 계보의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는 인물이다. 손목인의 선 굵은 선율과 박시춘의 섬세한 감각을 겸비했다는 평을 받았다. 사망 후 [[문화훈장]] 보관장을 추서받았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