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노베 료키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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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도쿄]]에서 헌법학자인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와 수학자이자 정치가인 [[기쿠치 다이로쿠]]의 장녀, 미노베 다미코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7년]] [[도쿄 대학교|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여 동 대학 조교로 근무하였으며,[[1929년]] 동 대학 농대 강사를 거쳐 [[1935년]]에는 [[호세이 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1937년]] [[코민테른]]의 반 파시즘 연합전선에 호응한 대학교수들이 일제 검거된 [[인민전선사건]]으로 교단을 떠나게 된다. 다음해 일본의 화학품제조회사인 신에츠 화학공업에 촉탁한다. [[1945년]]에는 [[마이니치 신문]] 논설위원으로 언론계에 입문. [[1946년]]부터는 내각통계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고 사무국장을 겸임한다. [[1949년]]에는 도쿄교육대학 교수로 다시 학계에 복직했다. 이후, 경제안정본부, 행정관리청 통계기준부장 등을 거쳐 도지사 출마직전에는 [[NHK]]의 〈쉬운 경제학교실〉이란 프로그램의 해설자를 맡아 일반인의 인지도를 높였다.
 
== 도지사 시절 ==
[[1967년]] [[일본사회당|사회당]], [[일본공산당|공산당]]의 추천으로 입후보하여 [[자유민주당 (일본)|자민당]],[[민사당]] 추천의 마쓰시타 마사토시 릿쿄대 교수와 [[공명당]] 추천의 아베 켄이치 시부자와 해운사 사장을 제치고 도지사로 당선되었다. [[1971년]], [[1975년]]에 연속으로 재선되었으며, 특히 1975년에는 현 도쿄도지사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와 대결하였다. 당시에는 부라쿠 해방동맹을 둘러싸고 사회당과 공산당 사이에 대립관계에 있었기에 양당의 추천을 얻기 어려웠고, 이에 본인은 불출마를 염두에 두기도 했으나, 이시하라에 의한 파시즘의 부정을 저지한다는 기치아래 출마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후에 (1999년) 도지사가 된 이시하라는 “도쿄는 예전 공산주의자 도지사때문에 발전에 뒤처졌다”[http://homepage3.nifty.com/m_and_y/genron/ishihara/data/20010127mainichi.htm]라며 미노베를 비판하였다.
그는 혁신계 단일후보로 출마하여 많은 정책을 실시했는데, 그 중 잘 알려진 것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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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베 도지사는 [[1971년]] 일본의 현직 도지사로서는 유일하게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면담하는 등, 대북정책에서 유화적인 편이었으며, 이런 점에서 보수적인 일본인들로부터 “친북정책”으로 비판받았다. 후에 그가 실시한 재일 조선인에 대한 대부분의 정책은 이시하라 신타로의 취임과 [[일본인 납치사건]]이후 무효화되었다.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정부중에서대한민국정부 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더 가까운 편이었으나, 그가 실시한 재일외국인 의료보험혜택정책은 많은 대한민국 국적의 재일한국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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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
경제학자, 정치학자로서 많은 저술도 남겼다.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고민하는 민주주의 《苦悶するデモクラシー》
* 일본경제도설 《日本経済図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