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E. 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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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전쟁 ===
남부에서 처음엔 버지니아주군의 사령관이 되지 않고, 1861년 8월 남부연합군대장(Full General)에 임명되었다. 그때 동시에 임명된 5명중 선임순위는 3위였다. 리는 당초엔 버지니아주 서부의 부대사령관, 캐롤리아니주 연안의 방위사령관, [[제퍼슨 데이비스]] 연합국대통령의 군사 고문을 역임했으나, 북버지니아군 사령관 [[조셉조지프 존스턴]] 대장이 1862년 6월 1일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 (버지니아 주)|리치먼드]] 부근까지 침공한 북군의 [[포토맥군]]을 맞아싸운 [[세븐 파인즈 전투]](Battle of Seven Pines)에서 중상을 입어 더 이상 군대를 지휘할 수 없게 되자 그 후임으로 기용되었다.
 
리는 6월 25일부터 7월 1일까지 벌어진 [[7일 전투]](Seven Days Battles)에서 매일 포토맥군에 공격을 가해, 우세한 적에게 리치먼드 침공을 단념하게 만들었다. 이 전투로 인해 명성을 얻은 리는 남부연합의 항복직전에 남부 육군 총사령관에 임명될때까지 북버지니아군 사령관으로서 동부전선의 지휘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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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언제나 항상 북군에 비해 열세의 군을 지휘하고, 보급의 어려움에 괴로워했으나, 대담한 기동과 적의 의표를 찌르는 공격으로 북군을 괴롭히기를 계속해, [[제2차 불런 전투]], [[프레더릭스버그 전투]], [[챈슬러즈빌 전투]]등에서 승리를 거두고, 북군의 리치먼드 침공의 의도를 저지하는 데 노력했다. 또한 2번에 걸쳐 북부영역에 대한 침공작전을 실시하여, 1862년 [[앤티텀 전투]], 1863년 [[게티스버그 전투]] 등에서 북군과 전투를 벌였다. 리는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패배해 남부로 후퇴한 후, 데이비스 대통령에게 사임을 요청했으나, 리 말고 수적으로 뒤지는 [[북버지니아군]]을 이끌고 북군에 대항할 수 있는 장군이 남부에는 없었기에 데이비스 대통령은 이를 기각했다.
 
1864년 [[율리시스 그랜트]] 중장이 북부연방 육군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북부의 물량적 우위를 충분히 활용하는 전략을 수립하자, 리는 방어전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1864년 6월 수도 리치먼드 근교까지 후퇴하여 방어를 굳혔다. 1865년 1월 31일 남부 의회에 의해 남부 육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남부연합의 세력이 만회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고, [[1865년]] [[4월 3일]] [[리치먼드 (버지니아 주)|리치먼드]]가 함락되었다. 리는 군을 지휘하여 리치먼드를 탈출하여 죠셉조지프 존스턴군과 합류를 시도했으나, [[버지니아 주]] [[애포매톡스]]에서 북군에게 사로잡혀 1865년 4월 9일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였다. 일부 장교는 부대를 해산시켜 산속으로 도망쳐 게릴라전을 계속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었다고 느낀 리는 이를 거절하고 항복후에도 남부 병사들에게 게릴라전을 하지말고 투항하라고 호소하였다.
 
=== 지휘관으로서 자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