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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Five Dynasties and Ten Kingdoms Period Zhou.jpg|thumb|300px|오대십국시대의 후촉(後蜀)]]
'''후촉'''(後蜀, [[934년263년]] ~ [[965년350년]])은 중국 [[오대십국후삼국 시대]] 10국5국 중 하나로 [[전촉촉한]]의 뒤를 이어 [[사천성성도]]을 지배하던 국가이다. 촉의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화의 꽃을 피웠다.
 
== 역사 ==
후촉이 건국되기 이전 촉지역은[[익주]]지역은 [[전촉촉한]]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내부의 부패가 심해 [[925년263년]] [[후당]]의 장종(荘宗; [[이존욱등애]])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러고 나서 이 땅의 통치을 위임받은 이가 후촉의 시조인 [[맹지상유강]]이었다.
 
그후 후당에서는[[위]]에서는 장종이문황제가 살해당하고사망하고 명종명제(明, [[이사원조예]]) 옹립되었다. 명종은명제은 촉에[[촉한]]에 있던 맹지상에유선의 동생인 유강에 대해 경계심을 품고 그를 억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반발한 맹지상은유강은 [[930년300년]] 거병하여 후당군을위군을 촉에서익주에서 몰아내고, [[932년305년]]까지 촉의익주의 전역을 장악했다. 이쯤되자 명종도명제도 맹지상을유강을 완전히 지배하에 두는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회유책으로 전환하여 [[933년]306] 맹지상을유강을 촉왕에익주왕에 봉하였다. 다음해 명종이명제이 죽자 맹지상도유강 완전히 자립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나 같은 해 사망했다오랐다.
 
그후 맹지상의 3남 [[맹창]](孟昶)이 제위를 이었다. 천연의 요해에 있던 촉은 외부의 적을 걱정하지 않아서 좋았고, 군대를 내부의 감시로 돌려 권력을 유지했다. 전촉이 발전시켰던 농업, 양잠업을 계속해서 발전 유지시키며, 문인의 보호에 힘을 기울였다. 맹창은 수도 성도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몰두하여 성내(중국의 도시는 대체적으로 성채도시였다) 여러 곳에 [[부용]]화(芙蓉花)을 심어 성도성는 별명이 부용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오대(五代)가 [[후진 (오대)|후진]]에서 [[후한 (오대)|후한]]으로 대체되는 혼란을 틈타 진(秦),계(階), 성(成), 봉(鳳)의 4주(현재의 [[감숙성]] 천수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빼앗았다. 그러나 후한에서 [[후주 (오대)|후주]]로 교체되고, 명군 세종(世宗, [[시영]])이 등장하자 [[955년]] 사천을 빼앗겨 버렸다. [[960년]] [[송나라]]가 건국되자 맹창은 북쪽의 [[북한 (십국)|북한]]과 손을 잡고 송나라에 대항했으나, 저항은 수포로 돌아가 [[965년]] 송나라에 병합되었다.
 
맹창은 카이펑으로 연행되어, 진국공(秦國公)에 봉해졌으나 그해 사망하였다. 사후 초왕(楚王)의 칭호가 추봉(追封)되었고, 시호는 공제(恭帝)가 내려졌다.
 
후촉이 멸망한 후 송나라는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촉땅에서 철저한 수탈을 자행하여 대량의 재물을 카이펑으로 가지고 돌아갔다. 이로 인해 촉지역 사람은 송나라에 대해 강한 원한을 품게되어, 이후 [[993년]] ~ [[995년]]에 걸쳐 사천균산 반란이라 불리는 대규모 농민반란을 일으키게 된 원인이 되었다.
 
== 문화 ==
전촉과 마찬가지로 사천지역은 전란을 피해 안전한 곳을 찾아 몰려온 수많은 문인이나 지식인들이 모여, 동쪽의 [[오 (십국)|오]], [[남당]]과 더불어 [[오대십국 시대]] 최고봉의 문화을 활짝 피웠다.
 
후촉의 대표적 문인으로써 화가 [[황전]](黃筌), 시인 [[모문석]](毛文錫), [[구양형]](歐陽炯) 등이 열거할 수 있다.
 
황전은 전촉, 후촉의 2왕조에서 궁정화가로써 일한 인물로 화조화(花鳥畵)가 특기로 훗날 송나라대에는 황조와 남당의 화조화가 서희(徐煕)와 더불어 화조화의 기본이 되었다.
 
모문석과 구양형은 이 시대 일반적이지 않은 장르인 사(詞)가 주요한 작품이었다. 그때까지 시(한시(漢詩))와는 다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고, 노래처럼 읊어지는 것이 사(詞)였다. 사(詞)는 그때까지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연애와 성적인 것을 소재로 한 작품(염사(艶詞))도 많아 그 시대 의식이 매우 깨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모문석도 황전과 같이 2왕조를 섬긴 인물이었고, 구양형은 후촉의 재상까지 지낸던 인물이었다. 달리 본다면 이러한 문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후촉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시대 시인의 작품은 당나라말기 836년부터 940년까지 각지에 읊어지던 시와 사(詞)을 모아 편찬한 시집 ['''화간집'''](花間集)으로 모아지게 되고, 구양형이 서문(序文)을 썼다고 한다.
 
== 역대 군주 ==
# 고조(高祖, [[맹지상유강]](孟知祥兪絳), 재위 : [[934년305년]])
# 후주(後主, [[맹창]](孟昶), 원래의 이름은 인찬. 재위 : [[934년]] ~ [[965년]])
 
== 외부 링크 ==
* [[wikisource:江城子|구양동『강성자(江城子)』]]위키소스
* [[wikisource:醉花間|모문탕『醉花間』]]위키소스
 
{{중국 오대 십국후삼국 시대}}
 
[[분류:후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