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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부학에서 '''[[위 (기관)|위]]'''(胃)는 동물의 소화기관 중 하나이다.
{{다른 뜻|조위 (1454년)||조선의 학자}}
*'''위'''는 중국의 옛 나라이다.
[[파일:Sanguo map.jpg|300px|thumb|삼국세력지도 (262년)]]
** '''[[위 (전국)|위]]'''(魏, 기원전 403~기원전 225)는 [[전국 시대]]의 왕조이다.
** '''[[위 (춘추전국)|위]]'''(衛, ?~기원전 209)는 [[춘추 시대|춘추]]·[[전국 시대]]의 나라이다.
** '''[[위 (삼국)|위]]'''(魏, 220~265)는 [[삼국 시대 (중국)|삼국 시대]]의 나라이다.
** '''[[북위 (북조)|위]]'''(魏) 또는 '''북위'''(北魏, 386~534)는 [[남북조 시대]]의 왕조이다.
*[[한국의 성씨]]
** '''위'''(韋)는 성씨의 하나이다.
** '''위'''(魏)는 성씨의 하나이다.
* '''[[Wii]]'''는 닌텐도가 개발한 게임기이다.
* '''[[WE]]'''는 [[대한민국]]의 [[애니메이션]] 전문 [[케이블]] 채널인 [[투니버스]]에서 발매한 [[만화영화]] 주제곡 모음집이다.
 
{{중국사disambig}}
'''위'''(魏, [[220년]]~[[265년]])는 [[후한]]이 멸망한 후 [[삼국시대 (중국)|삼국]] 중 하나로 삼국 중 가장 강대했던 나라였다. 천부적인 전략과 재능을 가진 [[조조]]는 삼국 시대의 군웅들 가운데 두각을 일찌감치 드러내었고, [[후한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협천자 영제후(挾天子領諸侯) 즉,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여 천하쟁패의 시대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cs:Wej]]
당대의 숙적 [[원소 (후한)|원소]]와의 [[관도대전|회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원 일대를 평정하여 최강 세력으로 발돋움했다. [[조조]] 사후 그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한나라를 멸하고 위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조씨 세력은 [[촉한]] [[제갈량]]과의 대결에서 급격히 성장한 [[사마의]]에게 정권을 내주었고, 그의 손자인 [[사마염]]에 이르러 제위마저 내주고 말아 46년의 역사로 그 끝을 맺는다. [[중국 대륙]]이 삼국으로 분할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위나라의 영토가 당시 중국 영토의 3분의 2를 차지하였고, 병력과 인구 면에서도 압도적 우세를 보였다.
[[de:Wei]]
 
[[en:Wei]]
== 역사 ==
[[eo:WEI]]
《[[삼국지]]》에서 정통으로 삼고 있는 위나라는 220년(황초 원년) [[후한]] 왕조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으면서 [[266년]](진시 원년) [[사마염]]에게 선양하기까지 5대 황제 46년간에 걸친 왕조로, 실제 건국은 [[조조]]가 죽은 이후에 일어난다
[[es:Wei]]
 
[[fr:Wei]]
[[189년]](중평 6년) [[조조]]는 여러 제후와 함께 동탁 토벌을 위해 군사를 모집하는데, 이때 [[조인]], [[하후돈]], [[하후연]] 등 조조의 일족이 그를 따른다. [[191년]](초평 2년)에는 일찍이 청류파 지식인이었던 [[순욱 (후한)|순욱]]이 조조의 진영에 가세한다. 순욱은 [[곽가]], [[순유]], [[종요]] 등 국방과 내정 면에서 활약하는 여러 명사들을 천거했다. 192년에는 [[황건적]]의 잔당을 굴복시켜 자기 군사로 흡수한 다음 정예를 선발해 ‘[[청주병]](靑州兵)’으로 부른다. 이 정예 부대가 대륙 각지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id:Wei]]
 
[[it:WEI]]
조조는 [[원술]], [[여포]], [[원소 (후한)|원소]] 등을 쳐부수고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적장이었던 [[장료]], [[장합]], [[가후]]와 같은 인재를 얻는다. 조조는 옛 원한을 잊고 재능만 있다면 투항한 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도 그 뜻에 감복하여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이 ‘재능제일(才能第一)’이라는 인재등용 방침은 210년에 ‘구현령(求賢令)’으로 공포되는데, 여기에 기라성 같은 인재가 모여들어 크게 활약하게 된다. 이것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조조의 수집벽인데, 알고 보면 조조의 뛰어난 통솔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ja:魏]]
 
[[nl:Wei]]
[[후한]] 왕조는 이미 쇠퇴하고 있었지만 조조는 황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196년]](건안 원년)에 [[후한 헌제|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그를 받들어 [[허창]]으로 천도한다. 이때 [[원소 (후한)|원소]]의 참모도 황제를 영입할 것을 진언하지만 원소가 주저하는 사이 조조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조조는 황제를 봉대함으로써 대의명분을 얻어 관군이 되고, 자신에게 대적하는 자는 조정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no:Wei]]
 
[[pl:Wei]]
또한 같은 해에 ‘전농부 [[둔전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당시 전쟁은 현지 조달로 식량을 충당했는데, 식량이 남으면 버리고 부족하면 약탈하는 식이었다. 그 때문에 농촌은 황폐해지고 유랑민이 급증했다. 이에 조조는 “천하를 통일하는 일은 강력한 군대와 충분한 식량에 달려 있다”면서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 계획적으로 식량을 생산·저장하려고 시도한다. 이리하여 백성을 모집해 빈농에게는 토지뿐만 아니라 밭갈이 소와 농기구, 그리고 종자까지 대여해 낙양, 허창 주변에서 둔전시킨다. 이미 둔전제 자체는 [[한나라]] 때부터 있었지만 조조의 둔전제는 각지에 전농부를 설치하고 전농관이라는 농업 전업관에게 이를 관리하게 했다. 그래서 사방을 정벌하는 데 식량을 수송하는 노고가 없어져 삼국시대 최대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pt:Wei]]
 
[[ru:Вэй]]
조조는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208년에 [[승상]], 213년에 위공(魏公), 216년에 위왕(魏王)이 되어 이미 제위를 넘볼 수 있는 세력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후한의 충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황제로 즉위하지는 않는다. 조조가 죽은 지 9개월 후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음으로써 황제가 되었다.
[[sh:Wei]]
 
[[sv:Wei]]
[[조비]]는 수도를 다시 허창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여, 낙양을 발전시키는 데 힘쓴다. 낙양은 중국 삼국 시대 중 규모·인구 면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아버지 조조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였으며, 부하·장수들을 등용함에 있어서 허물이 없게 하였다. 그런 조비가 황제에 오른 지 겨우 7년 만에 병사한 후, 위나라는 [[제갈량]]이 이끄는 [[촉한|촉나라]]의 침입을 받게 되고, 그 뒤를 이은 [[조예]]조차 239년(경초 3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후계자 [[조방]]은 이때 겨우 8살로, [[사마의]]와 [[조상]]이 후견인이 된다. 곧이어 조상은 사마의의 실권을 빼앗고 정무에서 소외시키지만 사마의의 노회환 전술에 말려들게 된다. 249년(정시 10년) 사마의는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조상 등을 실각시키고, 그에게 무고한 반역죄를 씌워 삼족을 모두 멸하고 만다. 이리하여 조씨 일족은 쇠퇴하고 실권이 사마씨에게 옮겨지며, 사마의가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 [[사마사]], [[사마소]]에게로 권력이 승계되었다.
[[zh:魏]]
 
[[zh-classical:魏(釋義)]]
[[254년]](가평 6년)에는 [[이풍 (조위)|이풍]], [[장집]] 등이 주도한 [[사마사]] 제거 계획마저 실패하여 모두 처형되고, 황제 [[조방]]도 폐위를 강요받는다. 이때부터 [[관구검]], [[문흠]]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고, [[257년]](감로 2년)에는 [[제갈탄]]의 반란이 일어나지만 모두 진압되어 사마씨에 반대하는 세력이 일소된다. [[260년]]에는 [[조방]]의 뒤를 이은 [[조모]]가 [[사마소]]를 제거하려고 수백 명의 측근을 이끌고 출격하는데, 반격하는 군사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리하여 마지막 황제 [[조환]]이 사마소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지만, 사마소가 갑자기 죽게 된다. 마침내 [[266년]](함희 2년) 아들 [[사마염]] 시대에 선양에 의해 [[진 (위진남북조)|진 왕조]]로 정권이 교체된다.
[[zh-yue:魏]]
 
== 역대 황제 ==
{{중국 황제 (위-삼국)}}
 
== 연대표 ==
{| class="wikitable"
! 서력
! 사건
|-----
| [[155년]] || 조조 태어남.
|-----
| [[189년]] || 조조, 향리에서 동탁 토벌을 위한 의병을 모집함.
|-----
| [[192년]] || 연주목으로 영입되어 정예군 청주병을 조직함.
|-----
| [[196년]] || 헌제를 봉대하고 허창으로 천도함. 둔전제 시행.
|-----
| [[200년]] || 백마, 관도에서 원소군을 무찌름.
|-----
| [[207년]] || 오환을 정복하여 평정.
|-----
| [[210년]] || 구현령과 술지령 공포.
|-----
| [[213년]] || 조조, 위공이 됨.
|-----
| [[215년]] || 조조의 딸, 헌제의 황후로 세워짐. 한중을 평정.
|-----
| [[216년]] || 조조, 위왕이 됨.
|-----
| [[219년]] || 조조, 한중을 잃음. 손권과 연합, 관우를 격파함.
|-----
| [[220년]] || 조조 서거. 조비, 문제에 오름. 후한 황조 멸망. 낙양으로 천도함.
|-----
| [[226년]] || 조비 승하. 조예 즉위.
|-----
| [[234년]] || 사마의가 오장원에서 제갈량과 대치.
|-----
| [[237년]] || 요동의 공손연이 반기를 듦.
|-----
| [[238년]] || 사마의, 공손연의 난을 진압.
|-----
| [[239년]] || 조예 승하. 조방 즉위.
|-----
| [[249년]] || 사마의,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일당을 처형함.
|-----
| [[251년]] || 왕릉의 사마의 타도 계획 실패. 사마의가 죽고 사마사가 뒤를 이음.
|-----
| [[254년]] || 사마사 주살 계획 실패. 조방이 폐위되고 조모가 옹립됨.
|-----
| [[255년]] || 사마사가 죽고 동생 사마소가 뒤를 이음.
|-----
| [[257년]] || 제갈탄이 오나라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나 다음해 진압됨.
|-----
| [[260년]] || 조모가 사마소를 토벌하려다가 살해됨. 조환 즉위.
|-----
| [[264년]] || 사마소, 상국지공이 됨. 촉나라 정복.
|-----
| [[265년]] || 사마소, 진왕이 됨.
|-----
| [[266년]] || 사마소, 죽음. 사마염이 뒤를 이음. 위 황조가 멸망하고 진 황조 성립.
|}
 
[[분류:위나라 (삼국 시대)| ]]
 
{{Link GA|zh-classical}}
 
[[ar:مملكة واي]]
[[br:Cao Wei]]
[[ca:Cao Wei]]
[[de:Wei-Dynastie]]
[[en:Cao Wei]]
[[es:Wei (reino)]]
[[fi:Wei-kuningaskunta]]
[[fr:Royaume de Wei]]
[[hak:Chhâu Ngùi]]
[[hr:Cao Wei]]
[[id:Cao Wei]]
[[it:Regno Wei]]
[[ja:魏 (三国)]]
[[ms:Cao Wei]]
[[nl:Koninkrijk Wei]]
[[no:Wei-dynastiet]]
[[pl:Wei (Okres Trzech Królestw)]]
[[pt:Cao Wei]]
[[ru:Вэй (царство)]]
[[sh:Cao Wei]]
[[sv:Cao Wei]]
[[th:วุยก๊ก]]
[[uk:Династія Вей]]
[[vi:Tào Ngụy]]
[[zh:曹魏]]
[[zh-classical:曹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