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1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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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미군정기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만큼 사회주의, 공산주의운동이 왕성하던 곳이었다. 광복 이후 [[미군정]]기의 남한내 민중들의 삶은 굶주리는 처지였다. 미군정의 쌀 배급 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콜레라]]가 창궐한 [[대구]]의 굶주림은 특히 더 심했었다. 대구, 경북 일대에 2천여 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자 치료를 위한 조치들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전염을 막는다며 대구를 봉쇄해버린 탓이었다. 차량은 물론 사람조차 시경계를 넘을 수 없게 되면서 그 결과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쌀이 부족했다. 당시 돈이 있다해도 쌀을 구할 수 없어 [[콜레라]]를 치료하는 의사들조차도 콩나물과 쌀로 죽을 끓여 먹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또한 국립경찰<ref>군정기 시절 경찰은 '국립경찰'이라고 불리었다.</ref>로 채용된 과거 친일파 출신 경찰들이 일제시대 방식 그대로 농민들이 쌀을 강탈하다 시피 공출해갔다.<ref name="최능진"/><ref>[http://www.youtube.com/watch?v=Ju1dy3jmdvU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ref> 친일출신 경찰들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매우 커져갔고, 경찰은 이에 대해 보복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었다. 이러한 가운데 [[대구]], [[경북]] 일대의 민심은 매우 흉흉했다.<ref name="최능진"/>
 
한편,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미군정에서 '공산당 활동 불법화'를 공표함과 동시에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는데 [[박헌영]]계열 [[조선공산당]]세력들에서는 "[[미군정]]에 대항하겠다."면서 '신전술'이라는 방식을 채택하여 더욱 급진적 성향을 보이게 된다. 이어 공산당과 [[전평]]은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1946년]] 9월에 철도노동자, 운송업노동자들이 주도해 대대적인 파업을 벌였는데, 이것이 [[9월 총파업]]이다. [[9월 총파업]]은 [[부산]]지역을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번져나갔었다. 이렇게 되어 공산당과 전평은 [[9월 총파업]]을 주도해 나아가 본격적으로 미군정에 정면충돌을 벌였다.<ref>당시 박헌영은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비밀리에 월북, 해주에 있다가 소련을 방문하였다.</ref> [[9월 총파업]]으로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가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미군정은 국립경찰과 반공청년단체를 투입하여 파업에 진압하였으나, 여기서 의외의 사태를 맞게 되는데 [[대구]]지역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자 즉흥적인 폭동으로폭력 사태로 발전되어 버렸다.<ref>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p379</ref>
 
== 전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