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고등상업학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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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고등상업학교가 조선총독부 관립으로 이관되었을 때 재정적자가 심각했지만, 조선총독부는 재정적자를 해결하지 않고 교직원의 급여와 필수적인 운영 비용만을 지원했다. 이 때문에 다른 관립전문학교와 달리 학교 운영 비용의 절대적 비용을 수업료와 공납금으로 충당해야 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 내내 학교 운영이 어려웠고, 학생들이 부담하는 수업료와 공납금이 타 전문학교보다 훨씬 비쌌다. 비싼 수업료ㆍ공납금으로 인해 중퇴자가 많았으며, 조선인은 50%내외의 중퇴율을 보여줬다.
 
1920년대 이후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진행되면서 당시 취업시장에서 여러 전문학교들 중에서 상업학교의 인기가 가장 많았기 때문에 경성고등상업학교도 높은 경쟁률을 보여줬다. 다만, 타 전문학교보다 비싼 수업료와 공납금과 입시와 학교생활에서의 조선인ㆍ일본인 간의 차별 때문에 조선인들의 지원이 상대적으로 적어 3:1에서 6:1의 다소 낮은 경쟁률을 보여줬다. 참고로, 조선인 본위의 학사 운영이 이루어졌던 '''보성전문학교''' 상과의 경우에는 매년 해가 갈 수록 지원자가 격증하여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20:1의 극심한 경쟁률을 보여줬다.<ref>보성전문학교 상과에는 타 전문학교 졸업생이 다시 입학하기 위해 응시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 조선일보, 1936년 7월 2일</ref>
 
1939년 경성고등상업학교는 종암동의 우석학원(友石學園) 건물로 이전하게 된다. 한편, 1944년 전시총동원체제의 강화로 교육예산이 급감함에 따라 경성고등상업학교는 [[경성법학전문학교]]와 통폐합되어 '''경성경제전문학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