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오 일병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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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오'''(崔永吾, [[1938년]] ~ [[1963년]] [[3월 18일]]) 일병 사건은 1962년 7월 8일 오전 8시, '애인에게 온 편지를 뜯어보고 놀렸다'는 이유로 상급 병사 2명을 살해한 최영오 일병이 사형당한 사건을 말한다. 최영오 일병은 서울대 천문기상학과를 휴학하고 입대한 단기 학보병 신분이었다. 명문대생이라는 점 때문에 사회적으로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사형 판결에 대해 각계 각층에서 구명운동이 벌어졌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1963년 [[3월 18일]] 오후 2시 40분, 서울 근교 수색의 형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94163 1963년 3월 19일 육군 일병이 총살당했다...왜?]</ref> 처형 직전 그는 "제가 죽음으로써 우리나라 군대가 관료주의적인 것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민주적인 군대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31900209207009&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03-19&officeId=00020&pageNo=7&printNo=12733&publishType=00020 處刑目擊者(처형목격자)의手記(수기) 嚴(엄)한 軍律(군율)앞에 숨진 젊음]</ref> 최영오 일병의 사체 인수 통지서를 받아들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그날밤 11시 50분 쯤 서울 마포 근처 한강에 투신자살했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푸른별 아래 잠들게 하라]]'라는 영화도 제작 되었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