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무공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52번째 줄:
}} </ref>
 
또한 이순신을 비롯하여 [[김시민]] 등 그나마 죽은 영웅들에게는 평가를 하였으나, 살아남은 명장들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이는 선조 임금의 정치적 견제에 의한 것인데 선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에 발발한 [[이몽학의 난]]으로 인하여 엄청난 충격을 받고 정치적으로 자신감을 잃었다. 이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높은 등급의 공신 칭호를 함부로 내려줄 경우 그들이 언제 선조의 권력을 넘볼지 알 수 없는 형국이였다. 일례로 선무공신에 의병장이의병장의 전무한비율이 압도적으로 적은 것도 [[이몽학]]이 의병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였다.
 
[[북관대첩]]을 세운 [[정문부]]와 [[상주대첩]]의 [[정기룡]], 그리고 후일 [[조선 정조|정조]]에 의해 "성주대첩"은 "노량대첩"에 비길만한 공이라는 찬사를 받고, [[성주]]에 쌍충사적비를 하사한 장본인인 [[제말]], 그 뛰어난 공에도 불구하고 선조에게 미움을 받았던 [[곽재우]] 등에 대한 저평가는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전쟁 기록의 신뢰성조차 의심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