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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작성일자=2009년 11월 27일|확인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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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의 정치자금 사용 의혹 ===
[[남로당]]원이며 [[박헌영]]의 비서를 지낸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1946년]] 무렵부터 여운형은 [[김일성]]의 정치자금을 받아서 썼다.<ref name="jung267">이철승·박갑동,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267페이지</ref> 또한 여운형은 비밀서신을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꾸준히 보냈다.
 
[[김일성]]은 교묘히 여운형을 지원했는데, [[1946년]] [[11월]] 공산당 내의 대회파, [[조선인민당|인민당]] 내의 여운형파 [[남조선신민당]] 내의 백남운파는 김일성의 후원을 얻어 사회노동당을 결성<ref name="jung267"/>했다. 이는 남로당에 흡수되었다. [[남로당]]이 주도한 [[10월 항쟁]]은 (남로당의) [[미 군정]]과 [[김일성]]에 대한 데모였다. 여운형은 10월 사태가 한창일 때 박헌영의 남로당과는 별개의 사회노동당을 결성했다.<ref name="jung267"/>
 
그런데 미 군정이 남로당과 타협할 기색을 보이자, 당을 결성한지 11일만에 해체하였다. 여운형은 [[1946년]] [[11월 11일]] [[남로당]]에 서로 합당하자는 서한을 보낸<ref name="jung267"/>다. 그러나 서한을 남로당에 발송하기 이틀 전, 평양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편지 형식의 보고서를 올렸다.<ref name="jung267"/>
 
그 편지의 사본은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할 때, 그의 가방 안에서 나왔다.<ref name="jung267"/> 그가 '46년 11월 9일에 여운형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고서 형식으로 보냈던' 편지의 사본 중 일부는 미군정을 통해 미국이 입수했고, 일부는 남로당 측에서도 입수했다.
 
당시 서울에 있던 미군정 정치고문 조제프 제이콥스는 이 내용을 [[1947년]] [[7월 31일]]자로 워싱턴의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냈다.<ref name="jung267"/> 조제프 제이콥스는 그 내용에 '여씨의 가방에서 발견
된 편지는 1946년 11월 10일자의 것이며, 여씨 자신의 친필로 된 것<ref name="jung267"/>'이라며, '(여운형이) 김일성과 김두봉 등과도 통신하고 있었다.<ref name="jung267"/>'고 [[미국]] 국무부에 보고했다.
 
여운형은 그의 자녀들을 [[김일성]]에게 맡기고 김일성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서 썼다.<ref name="jung335">이철승·박갑동,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335페이지</ref> [[조선공산당]]은 이를 두고 그를 김일성의 간자로 의심했다. 그러나 여운형이 남한내 좌익에서 몰락해 가자 [[김일성]]에게는 이용 가치가 없어졌다.<ref name="jung268">이철승·박갑동,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268페이지</ref> 여운형은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김일성]]이 싫다'는 발언을 했는데<ref name="jung268"/>, [[박갑동]]에 의하면 '이 말이 [[김일성]]의 귀에 들어가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은 누군가의 손에 죽게 되었다.<ref name="jung268"/>'고 한다.
 
=== 김일성과의 정치적 연대 의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