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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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는 1882년 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오라니엔바움(현재의 로모노소프)라는 마을에서 출생했다. 스트라빈스키는 1901년 페테르부르크 대학교의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법학보다 음악에 더 큰 관심을 보인 스트라빈스키는 같은 학교 친구인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아들 블라디미르와의 인연으로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만나 작곡 지도를 받게 된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당시 오케스트레이션의 대가였으며 당시 러시아 5인조 중에서도 서구 음악의 교육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그 결과 스트라빈스키의 초기 작품에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영향이 많이 나타났다.
1909년 당시 러시아 발레단을 이끌고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무대를 휩쓸던 디아길레프로부터 작품을 위촉받아 쓴 《불새》(1910)와, 1911년 사육제 기간의 페테르부르크 거리의 시장을 배경으로 하는 《페트루슈카》가 큰 인기를 얻으며 스트라빈스키는 유명 작곡가 대열에 합류한다.
1913년 스트라빈스키는 풍년을 기원하는 이교도들의 제전에서 봄의 신을 위하여 한 젊은 여인이 춤을 추다 결국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바친다는 내용의 《봄의 제전》을 작곡하는데, 《봄의 제전》은 초연될 당시 이교도 의식의 ‘원시적인’ 충동과 계속적인 불협화음, 타악기의 공격적인 리듬 등의 이유로 야유를 받았었다. 하지만 곧 놀라운 역동성과 추진력을 획득한 작품으로 바로크시대 이래 서양음악을 지배해 온 ‘강약의 규칙성’의 고정관습을 탈피한 획기적인 시도로 재조명받았고, 독특하고 불규칙한 새로운 리듬개념은 곧 다른 작곡가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러시아 혁명과 세계 1차 대전으로 조국을 떠나있던 스트라빈스키는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이후 ‘바흐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내건 신고전주의로 전환한다. 이 때 그가 작곡한 작품이 《풀치넬라》인데, 《풀치넬라》는 디아길레프로부터 페르골레지의 음악을 발레용으로 편곡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쓰게 된 작품으로 무대장치디자인은 피카소가 맡았다. 《풀치넬라》는 《봄의 제전》에 비하면 훨씬 축소된 악기편성으로 되어있다. 예상과는 달리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작품은 스트라빈스키의 본격적인 신고전주의 시대를 여는 결정적인 작품이 된다. 이 후 오페라 《마브라》, 《8중주곡》, 《오이디푸스 왕》 등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약식의 작품을 내놓았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스트라빈스키의 말년에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 국적을 획득하였으며, 《시편 교향곡》, 《3악장의 교향곡》, 《칸타타》 등을 작곡하였으며, 종교음악, 음렬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였다.
스트라빈스키는 카멜레온으로 불릴 만큼 한 사조에 머물러 있지 않고, 무대음악, 무조성 음악, 종교음악, 신고전주의 음악, 등 다양한 사조에 도전하였다.
==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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