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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초웅(盧山 初雄 로야마 하츠오, 1948년 3월31일~)사이타마현(埼玉県)출신의 무도가. 재단법인 극진장학회, 극진공수도연맹 극진관의 관장으로서 전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松井派)의 최고고문・수석사범. 극진가라데9단. 태기권 교사7단. 재일교포2세. 민족명은 노초웅(盧初雄)으로 귀화후 盧山初雄으로 되었다. 하단돌려차기를 특기로 하여「로우킥의 로야마」로도 불리웠다.
 
약력
1963년 고교1년생의 가을 대산도장 입문. 1964년 4월에 대산도장은 재단법인 극진장학회를 세우고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으로 쇄신되었다. 본부도장이 개설되고부터 1967년에 본부지도원에 취임, 지도에 임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유학생 영 카렌밧하와의 대결에 패한 것과 어떤 사건이 원인이 되어 금족처분을 받아 일시기 극진회관을 떠났다. 그 후에 이가라시(嵐五郎)라는 링네임으로 킥복싱의 링에 올라가기도 하고, 최영의와 교류가 있던 사와이 켄이치(澤井健一)로 부터 중국권법 의권의 갈래인 태기권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다시 가라데의 수행에 복귀한 것은 나카무라 히데오(강창수,中村日出夫((拳道会総師))의 문하가 되었을 때이다. 나카무라의 문하시대에 함께 수행하였던 쿠라모토 나리하루(주성춘,倉本成春)는 후에 의형제의 정을 나누는 등 친교를 깊이 하였다.
 
1973년에 극진회관 복귀를 허가받고 복귀후 처음으로 제5회 오픈토너먼트 전일본공수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하였다. 니노미야 조코우(二宮城光),사토 카츠아키(佐藤勝昭)등을 떨어뜨리고 결승전에 진출하여 제1회 전일본대회 우승자인 야마자키 테루토모(山崎照朝)와 대결하였다. 결과는 4대1의 판정으로 노초웅이 우승을 거머 쥐었다. 이 시합은 최영의(大山倍達), 오오야마 시게루(大山茂),고우다 유우조(郷田勇三)등 극진 관계자, 각종 매스컴에서 이야 말로 극진가라데의 정화라는 극찬을 받아「완성된 심기의 격돌이 대관중에게 승패의 행방을 잊게하고 깊은 감동의 세계에 빠지게 하였다」며 극진사상에 남는 명승부로 이야기 되어지고 있다.
2002년 12월 극진공수도연맹 극진관 설립. 관장 취임. 후에 공수도의 보급과 발전을 목적으로 공익법인인 재단법인 극진장학회를 부활시킴. 현재 재단법인 극진장학회를 축으로 분열된 극진류파를 모아 통일 대회를 실현시키는 중심적인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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