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기갑사단 (독일 국방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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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2 기갑사단'''(''2. Panzer-Division'')은 1935년에 창설되었으며,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에 [[오스트리아]]에 주둔했다. [[1939년]] [[폴란드 9월 전역|폴란드]] 및 [[프랑스 전투|프랑스]] 공격에 투입되었고, 그 후 폴란드에 배치되어 점령군 임무를 수행했다(1940년 ~ 1941년). [[1941년]], [[발칸 전역]]에 참전한 후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으로 이동 배치되었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전하지는 못했다. 전차와 중장비 대부분을 수송선으로 수송 중에 공격을 당해, 수송선이 침몰하는 바람에 대부분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 공격은 영국이 부설한 [[기뢰]]나 [[영국 해군]]의 [[잠수함]]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1941년 [[모스크바 전투]]와 1943년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 중부집단군|중부집단군]] 소속으로 싸웠다. 러시아 전선에서 심각한 손실을 입은 후, 사단은 재편성을 위해 [[프랑스]]로 보내졌다(1944년). 프랑스에서 [[노르망디 전투]]에 투입되었고, [[팔레즈 포위망]]에서 거의 전멸되었다. 그 후 사단은 재건되었고, [[벌지 전투]](1944년)에도 투입되어 전투를 치렀다. 벌지 전투 후인 1945년에는 [[라인 강]] 방어에 투입되었다가, 종전때종전 때 미군에 항복했다.
 
== 부대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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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계 : 322 대
 
폴란드 전투 후 12군12 군 예하 19군단19 군단 소속으로 배치되어 아이펠 지역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했고, 5월 [[프랑스 전투]]가 시작되자 [[영국 해협]]을 향해 진격하여 [[아베빌]]을 점령, [[덩케르크 포위망]]에서 연합군 포위망의 일부가 되었다.
 
서부 전역이 끝난 후 2 기갑사단은 폴란드에서 점령 임무를 수행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이 기간 동안 2 기갑사단은 다른 기갑사단 창설에 예하 병력을 차출당하기도 하고, 또 새로운 부대를 배치받으며 재편성 과정을 거쳤다. 4월에 [[루마니아]]로 이동하여 [[발칸 전역]]에 참가, 유고슬라비아 점령과 [[그리스]]의 [[아테네]]를 [[독일 6 산악사단|6 산악사단]]과 함께 점령했다.
 
발칸 작전이 끝난 후, 2 기갑사단의 기갑부대가 [[알바니아]]를 거쳐 [[유고슬라비아]]로 이동했고, 독일 동맹국이 된 [[크로아티아]]에 진주했다. 사단의 기갑부대는 [[그리스]]의 [[파트라스 항]]에서 양륙되어 이탈리아 남부의 [[타렌토]]로 해상수송되었다. 1941년 5월 21일, 사단의 차량 및 기갑 장비를 수송하던 독일 수송선 마부르크호와 키브펠스호는 영국군이 부설한 기뢰에 피침되어 침몰되었다. 결국 기갑장비의 상당 부분을 잃은 2기갑사단은2 기갑사단은 [[바르바로사 작전|소련 침공]]이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독일에 있어야 만 했고, 1941년 7월에 폴란드로 이동배치되었다. 1941년 8월, 프랑스 남부로 다시 이동했다가 9월에서야 러시아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10월에 전선에 배치되었다.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에서 2 기갑사단은 [[독일 중부 집단군|중부집단군]] 예하였으며, 1941년 가을에 Roslawl, Wjasma, Gshatsk과 모스크바 외곽에서 첫 전투를 겪었다. 1941년과 1942년의 겨울에 사단은 모스크바를 눈앞에 두고 소련군의 대규모 겨울 반격 작전에 직면했다. 2기갑사단은2 기갑사단은 르제프와 1943년 7월의 [[쿠르스크 전투]], [[드니에프르 강]] 방어 전투 등을 포함하여 1942년 대규모 방어전을 중부집단군 소속으로 계속 동부 전선에서 격전을 치렀다.
 
1944년 2월, 2기갑사단은2 기갑사단은 동부전선에서 물러나 휴식과 재보충을 하기 위해 프랑스로 이동했다. 프랑스에서 휴식 및 점령군 임무 수행 후 사단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에 맞서 격전을 치렀다. 절망적인 노르망디 전투 후 2기갑사단은2 기갑사단은 [[팔레즈 포위전]]에서 거의 괴멸되었다. 포위망에서 탈출했지만, 그 후 그 기간 동안 입은 손실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2기갑사단은2 기갑사단은 [[아이펠]]의 비트리히에서 [[독일 352 보병사단|352보병사단352 보병사단]]의 잔여 병력을 흡수하여 부대 정비 및 재편성을 한 후 1944년 12월, [[벌지 전투]]([[라인 수비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사단은 이 전투에서 애초 작전 계획에 가장 근접하게 가장 멀리 서쪽까지 진격했으나, 덕분에 미군의 반격이 집중되어 다시 큰 피해를 입고 전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다른 기갑사단들과 달리 2기갑사단의2 기갑사단의 전차부대들은 [[4호 전차]]로 구성되었고, 미군의 [[M-4 셔먼]]은 마주치면 도망쳐도 좋다고 공식 인정받은 [[5호 전차 판터]]나 [[6호 전차 티이거]]와 달리 4호 전차라면 적당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고립된 채 전선에 돌출한 2기갑사단으로서는2 기갑사단으로서는 연합군의 항공 지원에도 시달리며 전투를 치러야 했고, 한계에 다다른 2기갑사단은2 기갑사단은 결국 후퇴해야 했다(이때 상대한 미군 기갑부대도 [[미국 2 기갑사단|2 기갑사단]]이었으며, [[2 SS기갑사단 다스라이히|2 SS기갑사단]]도 가담했다).
 
1945년 3월과 4월, 사단의 얼마 안되는 생존자들은 [[튀링겐 기갑여단]]에 배치되어 중부 모젤과 풀다 지역에서 싸우다가 5월에 플라우엔과 쾨칭에서 미군에게 항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