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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자 책봉과 즉위 ====
그 뒤 [[1418년]]에 태종이 맏형이자 동복형인 [[양녕대군]]을 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에서회의<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D%9B%88%EB%AF%BC%EC%A0%95%EC%9D%8C&keyword=%ED%9B%88%EB%AF%BC%EC%A0%95%EC%9D%8C</ref>에서 “법을“세자의 존중하지행동이 않는지극히 세자가무도(無道)하여 군주가종사(宗社)를 된다면이어 무고한받을 사람들이 죽을없다고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청(請)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廢)하였다.”라고 것”이라고하며 혀를김한로와 연관되는 정도로등의 심각한 비행으로<ref>한쪽에서는 양녕대군이 일부러 비행을 해서 세종에게 왕위가 가게 했다고 주장하나, 다른 한쪽에서는 세종대왕이 즉위한 뒤에도 여전히 비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이덕일외 공저/김영사.</ref> 왕세자에서 폐위되자폐위되고 충녕대군의 학문이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黃喜)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이해 6월 22살의 그를 새 왕세자로 책봉하였다.<ref name="aks" /> 부왕이 왕세자를 폐위할 것을 예감한 [[효령대군]]은 세자 자리를 기대하였으나, [[양녕대군]]은 충녕대군에게 세자자리가 갈 것이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결국 부왕이 금지한 [[불교]]에 호감을 갖다가 심취하게 된 [[효령대군]]은 바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양녕대군]]은 광주로 내쳐지게 되었다.
충녕은충녕대군은 처음에는 [[세자]] 자리를 사양하는사양하였으나 제스처를받아들여지지 취하다가않고 바로이해 받아들인다.8월 같은초8일 태종은 음력왕위를 8월에왕세자에게 [[선위]]하였다.<ref물려 name="aks"주고 />연화방의 [[조선 태종|태종]]이세자궁으로 수강궁으로거처를 물러나자옮겼다. 그는충녕대군은 대보를이를 거두어줄 것을 여러번 청하였지만 [[조선 태종|태종]]의 결심이 굳건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서마침내 8월 10일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충녕은 처음에는 [[세자]] 자리를 사양하는 제스처를 취하다가 바로 받아들인다. 같은 해 음력 8월에 [[선위]]하였다.<ref name="aks" /> [[조선 태종|태종]]이 수강궁으로 물러나자 그는 대보를 거두어줄 것을 여러번 청하였지만 [[조선 태종|태종]]의 결심이 굳건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서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 재위 기간 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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