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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훈민정음}}
{{참고|한글}}
[[1420년]] 중앙새로운 집권조선을 체제를위한 운영하기 위해유교적 정책 연구수립과 연구를 위한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 이상으로 우대하였다우대하고 연구에 전념하도록 하였다.<ref name="aks" /> 이 집현전에서 [[1443년]] 세종은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정인지]](鄭麟趾), [[정창손]](鄭昌孫), [[이개]](李塏) 등의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하여 언어학 및 음운학을 연구하게 된다.
그는 문자 연구를이를 위해 당시 [[중국]]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찬]](黃瓚)을 만나려 하였으나, [[명나라]] 조정에서 허용하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세종은 [[성균관]] 주부 [[성삼문]], [[집현전]] 교리 [[신숙주]] 행 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 등을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을 만나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마침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이 죄를 짓고 요동(遼東)에 귀양 가 있자 일행은 그를 만나게만날 수 있게 되어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여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그는 이렇게 언어학 및 음운학을 연구한 끝에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도 자신의 뜻을 자유로이 글로 소통할 수 있게 하는 [[훈민정음]]을 친히 창제하였고 [[1446년]] [[음력 9월]]에 이를 반포하였다. 이후 훈민정음은 한때 암클, 언문등으로 천대 받는 이름으로도 불리다가 20세기에 들어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어 오늘날 한국어를 사용하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한국인들이 매일 읽고 쓰는 문자로 쓰이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그의 모든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힌다.<ref name="navercast" />
[[1443년]] 조선에 고유 [[문자]]가 없음을 개탄한 세종은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정인지]](鄭麟趾), [[정창손]](鄭昌孫), [[이개]](李塏) 등의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하여 언어를 연구하게 된다.
 
그는 문자 연구를 위해 당시 [[중국]]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찬]](黃瓚)을 만나려 하였으나, [[명나라]] 조정에서 허용하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세종은 [[성균관]] 주부 [[성삼문]], [[집현전]] 교리 [[신숙주]] 행 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 등을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을 만나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마침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이 죄를 짓고 요동(遼東)에 귀양 가 있자 일행은 그를 만나게 되어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여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그는 [[한자]]를 모르는 [[민중]]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3년여의 연구 끝에 [[훈민정음]]을 친히 창제하여 [[1446년]] [[음력 9월]]에 이를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암클, 언문등으로 불리다가 20세기에 들어 [[주시경]]선생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자로 쓰이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게 한, 그래서 그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히는 일이다.<ref name="navercast" /> 이때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한 신하 중에는 [[최만리]](崔萬理)와 [[하위지]](河緯地)가 있었는데, [[최만리]]는 청백리로 인정받았음에도 세종을 높이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폄하되었다 하여 그의 후손들은 복권운동을 시도하고 있다.
 
==== 의정부 서사제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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