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국: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로봇이 더함: sh:Usan-guk
편집 요약 없음
7번째 줄:
{{인용문|巻四 智證麻于十三年夏六月条
'''于山國'''征服、歳以土宜為貢、'''于山國'''、在溟州東海島、或名鬱陵島、地方一百里、恃嶮不服、伊喰異斯夫、為何琵羅州軍主、謂于山人愚悍、難以威来、可以計服、乃多造木偶師子、分載戦船、抵其國海岸、誑告曰、汝若不服、則放此猛獣踏殺之、國人恐懼則降}}
 
 
울릉도 현지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우산국은 우해왕이라는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우산국을 약탈한 왜구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직접 대마도까지 배와 군사들을 데리고 쳐들어가 대마도주를 위협하고 그의 딸인 절세 미녀 풍미녀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 들이는 조건으로 휴전을 맺었다.
 
 
풍미녀를 우산국으로 데려 온 우해왕은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그런데 풍미녀는 매우 사치스러운 여자였다. 그녀의 사치와 향락을 맞추어 주기 위해, 우해왕은 군사들을 이끌고 신라의 동쪽 해안가를 자주 약탈했다.
 
 
그러자 신라왕은 장수 이사부에게 수군을 주어 우산국을 정벌하도록 했다. 하지만 신라 군사들은 해전에 매우 서툴렀고, 이에 반해 우산국 군사들은 오랫동안 바다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해전에 익숙하여 신라 수군을 손쉽게 물리쳤다. 신라군은 크게 패했고, 이사부도 간신히 목숨만 건져 신라로 도망쳤다.
 
 
참패하고 돌아온 이사부를 본 신라왕은 매우 분노하여 처형하려 했으나, 이사부는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여 다시 군사를 모으고 수군을 조련하여 우산국을 재차 정벌하러 나섰다. 이 때 바로 나무 사자가 등장한다.
 
 
처음 보는 낮선 나무 사자를 본 우산국 사람들은 매우 놀라 두려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해왕은 끝까지 싸웠으나, 예전보다 더 잘 훈련되고 수가 훨씬 많은 신라군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우해왕은 이사부에게 항복하였고,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여 바다에 투신 자살하였다. 우해왕과 풍미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이사부의 첩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포항 MBC에서 2000년 8월 25일에 방영된 다큐멘터리인 '우산국'에서 밝혀진 우산국에 관한 정보들은 다음과 같다.
 
 
1. 울릉도의 고분에서 마구가 발굴되었고, 그로 인해 우산국에 기마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 신라 양식의 황금 왕관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우산국이 512년 신라 장군 이사부에게 멸망당한 이후에도 신라에서 통치자를 보내 다스리게 했다.
 
 
3. 우산국의 마지막 왕인 우해왕과 풍미녀에 관한 전설은 오래전부터 울릉도에 전해 내려왔다.
 
 
4. 우산국 사람들은 동예나 옥저, 진한, 변한에서 온 유민 출신들로 추정된다. 일본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것은 해류가 거꾸로 흘러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우산국의 기원은 일본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뜻)
 
 
5. 울릉도에서 1998년 고인돌이 발견됨에 따라, 최소한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토막글|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