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로셸 공성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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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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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앙리 4세]](Henry IV of France)가 공포한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에 의해 위그노에게 많은 특권이 부여되었다. [[라 로셸]]은 위그노의 자치가 이루어져 그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 지역은 위그노의 해상세력의 중심이 되었고, 중앙정부에 대한 저항의 거점이 되었다.<ref>''Warfare at sea, 1500-1650: maritime conflicts and the transformation of Europe'' by Glete J Staff, Jan Glete Routledge, 2002 ISBN 0203024567 p.178 [http://books.google.com/books?id=j4WGsMa6bmcC&pg=PA178]</ref> [[라 로셸]]은 당시 도시민이 30,000명을 넘어 프랑스에서 두 번째 혹은 세 번째에 해당하는 거대한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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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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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국왕군은 [[앙굴렘 공작 샤를 드 발루아|앙굴렘의 샤를]](Charles of Angoulême)이 이끄는 병사 7,000명, 기병 600명, 포 24문의 병력을 갖고 1627년 8월부터 라 로셸의 포위를 시작했다. 국왕군은 본그레느(Bongraine;현재 [[레 미님]](Les Minimes)과 [[포트 루이]](Fort Louis)를 증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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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에 대한 외국의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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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지원====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프로테스탄트의 라 로셸을 제압하기 위해 같은 프로테스탄트의 암스테르담 도시에서 선박을 임대했다. 그 때문에 프로테스탄트인 네덜란드의 선박에서 프랑스 병사들이 로마 가톨릭의 설교를 받는 것을 허락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가 암스테르담 시의회에서 논의되었다. 논의 결과 허용하지 않는다가 되었다. 네덜란드 선박은 프랑스 병사를 라 로셸에 수송했다.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적대하는 네덜란드의 동맹국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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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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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로셸의 시민은 잉글랜드의 구원이 서서히 절망적이 되는 와중에도 [[장 기통]] 시장 지휘하에서 14개월간 저항을 계속했다. 공성전의 전투와 기아, 질병에 의해 라 로셸의 인구는 27,000명에서 5,000명으로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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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은 무조건이었고, [[알레의 화의]]( Peace of Alais)의 조건에 의해 위그노는 그들의 영지,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 여러 특권을 잃어버리고, [[낭트 칙령]]에 의해 허락되었던 신앙의 자유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국왕의 자비 아래 놓이게 되었고,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철폐하고 탄압을 시작했을 때는 저항할 수단이 없었다.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라 로셸 공성전의 결과는 국왕이 프랑스 전 지역을 장악해 지방의 저항을 허용하지 않고 강력한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1627년 포위중인 전장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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