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 (16세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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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남원성 간략도.png|thumb|rught|160px|남원성 내부 간략도]]
 
'''신호'''(申浩, [[1539년]] ~ [[1597년]] [[8월]])는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장수였다. 과거 급제 후 여러 벼슬을 지내고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휘하의 장수로 견내량(見乃梁)·안골포(安骨浦) 등의 해전에서 공을 세워 여러 벼슬에통정대부로 임명되었다승진되었다.

[[1597년]](선조 30년) [[8월]]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본관은 [[평산]]이고, 시호는 무장(武壯)이다. [[전라북도]] 출신.
 
== 생애 ==
본관은 [[평산]], 자는 언원, 시호는 무장으로 선대 때에 [[전라도]] [[고부]]로 이주하여 살았다.
본관은 [[평산]], 자는 언원, 시호는 무장으로 [[1567년]] 무과에 급제해 조산만호를 지내고 도총부도사, 경력 등을 지냈다. 그 뒤 [[낙안군|낙안]] 군수로 있을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을 도와 [[견내량]]과 [[안골포 해전|안골포]] 등지에서 공을 세워 통정대부로 임명되었다.
 
본관은 [[평산1567년]],(명종 자는22년) 언원,무과에 시호는급제해 무장으로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에 [[1567년]]임명되었다. 무과에그뒤 급제해북방의 외직을 전전하며 북방에서 변경을 수비하다가 왕은 너무 오래 고생이 많다 하여 조산만호를내직으로 지내고불러들여 도총부도사, 경력 등을 지냈다. 그 뒤 [[낙안군|낙안]] 군수로 있을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을 도와 [[견내량]]과 [[안골포 해전|안골포]] 등지에서 공을 세워 통정대부로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에는 교룡산성수어사(蛟龍山城守禦使)로 있다가 [[교룡산성]]에서 [[고니시 유키나카]] 군을 맞았으며, [[남원성]]의 포위를 풀기 위해 올라온 [[이복남]]의 5천 군사와 합류하여 [[남원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후에 [[선무공신|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봉되고추록되고 [[증직|증]] [[형조판서]]에도 [[추증]]되었다. 남원의 칠충신사에 제향되었는데 [[1612년]](광해군 4년) 충렬사(忠烈祠)의 사액이 내려졌다.
 
==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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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살해된 사람]]
[[분류:조선의 공신]]
[[분류:전라북도 출신]]
[[분류:평산 신씨]]
[[분류:한국의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