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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呂運亨, {{llang|ko-KP|'''려운형'''}},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외교관·언론인·체육인이며 정치가이다. [[1945년]] 8월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구한 말 [[기독교]]의 평등 사상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교육·계몽활동을계몽 활동을 하다가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안창호]](安昌浩) 연설에 감화되어 동생 [[여운홍]](呂運弘)과 함께 독립운동에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투신했다.
 
외교관으로는 중국에 건너가 [[신한청년당]] 당수로 활동하여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기획하는 일을 주도하였고<ref name="이정식2">《몽양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지음, 서울대출판부 출간)</ref><ref name="도올"><<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 제10부 황포의 눈물>>-EBS</ref> [[김규식]] 등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으며파견했으며, 직접 [[일본]]을 찾아 담판을 짓기도 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임시 정부]] [[외무부|외무부 차장]] 등을 지냈으며 [[한국노병회]], [[시사책진회]], [[중한호조사]] 결성에도 참여하였고참여했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 때 [[안창호]], [[김동삼]]과 함께 개조파로 활동했으나 임정을 떠났다.
 
이후 [[북한]]과 [[러시아]]를 오가면서 [[쑨원]]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가담해 [[국공합작]]을 통한 중국혁명중국 혁명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활동하였다. [[1929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국내로 송환송환된 이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활동했다. 언론 활동으로는 1920년대 초중반 [[중화민국의 역사|중국]] [[상하이]]에서 [[동아일보]]의 상해주재상해 주재 촉탁 통신원과 [[타스 통신사]] 직원으로 지냈으며, 국내에서는 [[1933년]]~[[1936년]]까지 [[조선중앙일보]]사의 사장을 지냈다. 체육인으로는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과 [[미군정기]] 군정청 체육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4년]]부터는 비밀 지하 독립운동독립 운동 단체인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결성, 해방 뒤 [[1945년]] [[8월]] [[안재홍]], [[박헌영]]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성하여 혼란 수습과 치안 유지 등의 활동을 하였다했다. [[1946년]]부터는 [[김규식]], [[안재홍]]과 함께 통일 임시정부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위해 [[좌우합작운동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좌우합작을이를 반대하는 좌·우익 양측으로부터 테러를 10차례십여 차례 당했으며, 좌파단체의좌파 단체의 주도권을 놓고 [[박헌영]] 등과 경합하였다경합했다. [[1947년]] [[7월 19일]] [[서울특별시|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량으로 이동 도중, 배후가 불확실한 [[백의사]] 소속 [[한지근]](본명 이필형)외 5명의다섯 명의 저격을 받고 암살되었다.
 
사후 [[2005년]] [[대한민국]]에서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대통령장, [[2008년]] 다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 추서되었다추서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여운홍]]의 친형이고, 철학자 [[박찬기]]의 외삼촌이다. [[경기도 양평군|경기도 양평]] 출신으로출신이며, 호는 '''몽양'''(夢陽)이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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