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두메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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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뉴]] 지방의 [[캉탈]] [[오리야크]] 출생으로 국립공예원(國立工藝院)에서 수학을 전공, 6년간 [[망드]]에서 교사로 근무했으며,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하다가 [[1888년]], [[욘]] 주(州)의 급진당 소속 하원의원으로 당선, 정계에 진출하였다. 재정 전문가로 명성을 얻어 [[1895년]] [[11월]], [[레옹 부르주아]] 내각의 재무장관으로 처음 입각(入閣). 누진소득세를 도입하고자 했으나 상원의 반대로 성사시키지 못한 채, 5개월만에 사임하였다. [[1897년]] [[2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으로 부임. 재임 중 행정을 정비하고, 증세(增稅) ・공공토목사업의 전개를 통하여 [[식민지]] 통치의 기반을 다졌는데, 한편으론 과도한 세금 문제로 토착민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귀국(1902) 후엔
[[1932년]] [[5월 6일]] 오후 3시경, [[파리 (도시)|파리]]의 [[로트실트]] 회관에서 개최된 '종군(從軍)작가 구제를 위한 도서판매회'에 참석하던 도중, 정신착란증 환자로 판명된 백계(白系) [[러시아인]] [[파벨 고르굴로프]]로부터 저격당해 다음날인 [[5월 7일]] 오전 4시 37분 사망하였다(고르굴로프에게는 [[단두대]] [[공개처형]]이 선고되어 [[9월]]에 집행). 슬하에 5남 3녀를 둔 자식부자이자, 철저한 금주(禁酒) ・금연가(禁煙家)로 성실한 업무 태도와 인품이 평가되어 여론의 기대가 높았다고 한다. [[베트남]] [[하노이]]의 [[롱비엔]] 대교(大橋)는 그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인도차이나]] [[총독]]으로 재직할 당시(1899~1902) 건설된 것으로, [[아시아]] 최장길이(2.5km)의 교각이었으며, [[1954년]]까지 폴 두메르 대교라 불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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