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두메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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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뉴]] 지방의 [[캉탈]] [[오리야크]] 출생으로 국립공예원(國立工藝院)에서 수학을 전공, 6년간 [[망드]]에서 교사로 근무했으며,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하다가 [[1888년]], [[욘]] 주(州)의 급진당 소속 하원의원으로 당선, 정계에 진출하였다. 재정 전문가로 명성을 얻어 [[1895년]] [[11월]], [[레옹 부르주아]] 내각의 재무장관으로 입각(入閣), 누진(累進)소득세 도입을 구상했으나 상원의 반대에 부딪쳐 성사시키지 못한 채, 5개월만에 사임하였다. [[1897년]] [[2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인도차이나]] [[총독]]으로 부임해 재임 중 행정제도를 정비하고, 증세(增稅)・공공토목사업의 전개를 통하여 [[식민지]] 통치의 기반을 다졌는데, 한편으론 과도한 세금 문제로 토착민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귀국(1902) 후엔 하원으로 복귀, 급진사회당 우파의 리더격으로 당(黨) 노선의 온건화를 도모하였으며, [[1905년]]초부터 이듬해 [[6월]]까지 하원의장으로 재직했다. [[1906년]] 대통령 선거에 보수파 후보로 출마했으나, 중도좌파 연합의 [[아르망 팔리에르]]에게 패배한데다, [[1910년]] [[4월]]의 총선에선 의원직마저 상실했지만, [[코르시카]]로 선거구(選擧區)를 바꿔 상원의원으로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1912). [[1917년]] [[9월]], [[폴 팽르베 |팽르베]] 내각의 무임소장관 겸 전시(戰時)경제위원장으로 입각, 전후(戰後)에도 공직생활을 계속하면서 제7차 [[아리스티드 브리앙 |브리앙]] 내각(1921.1~1922.1)과 제8차 브리앙 내각(1925.12~1926.3)의 재무장관으로 재정 재건에 몰두하였다. [[1927년]] [[1월]], 상원의장에 취임한 동시에 예산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데 이어 [[1931년]] [[5월]], 급진사회당 우파의 지원을 받아 브리앙을 물리치고 [[프랑스 제3공화국 |제3공화국]] 1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취임은 [[6월 13일]]).
 
[[1932년]] [[5월 6일]] 오후 3시경, [[파리 (도시)|파리]]의 [[로트실트]] 회관에서 개최된 '종군(從軍)작가 구제를 위한 도서판매회'에 참석하던 도중, 정신착란증 환자로 판명된 백계(白系) [[러시아인]] [[파벨 고르굴로프]]로부터 저격당해 다음날인 [[5월 7일]] 오전 4시 37분 사망하였다(고르굴로프에게는 [[단두대]] [[공개처형]]이 선고되어 [[9월]]에 집행). 슬하에 5남 3녀를 둔 자식부자이자, 철저한 금주(禁酒) ・금연가(禁煙家)로 성실한 업무 태도와 인품이 평가되어 여론의 기대가 높았다고 한다. [[베트남]] [[하노이]]의 [[롱비엔]] 대교(大橋)는 그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인도차이나]] [[총독]]으로 재직할 당시(1899~1902) 건설된 것으로 [[아시아]] 최장길이(2.5km)의 교각이었으며, [[1954년]]까지 폴 두메르 대교라 불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