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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집''' (金昌集, 1648(인조 26)∼1722(경종 2))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작가로 자(字)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시호(諡號)는 충헌(忠獻)이며 본관은 (신)안동(安東)이다.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이며 문곡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다가 [[노론]], [[소론]] 분당 후에는 [[노론]]에 가담하였다.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 · 증 [[이조]][[판서]] [[김창흡]](金昌翕), [[김창업]] 등의 형이다. [[조선 순조|순조]]의 장인 [[김조순]]은 그의 4대손이었다.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으며, [[노론]]의 영수였으나 [[소론]]인 [[조문명]]의 처삼촌이기도 하다.<ref>조문명은 김창집의 동생 김창업의 사위이고, 영조의 서장자 효장세자의 장인이며 조선 정조의 양 외할아버지이다. 따라서 김창집은 효장세자의 처외종조부가 되고, 법적으로는 조선 정조의 외외종증조부가 된다.</ref>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 일족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신원, 복권시켰다. [[조선 경종|경종]] 때 [[조선 영조|연잉군]](후일의 [[조선 영조|영조]])의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했다가 [[소론]]에 의해 역모로 몰려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 및 아들 김제겸, 손자 김성행 등과 함께 사사된다.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불리며, 창협(昌協), 창흡(昌翕), 창업(昌業), 창즙(昌緝), 창립(昌立)등 육창(六昌)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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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배와 사사 ===
1721년(경종 1년) 스승격인 [[권상하]]가 죽자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10일 지평 윤성시가 김창집, 조성복 등의 죄를 논하고 이들을 벌할 것을 청하였고, 12월 25일 양사(兩司)에서 김창집 등을 안율해 처단할 것과 조성복(趙聖復)을 배소로 돌려보내라는 명(命)을 거둘 것을 청하였고,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의 반역 도모를 주장하여 12월에 신임환국(辛壬換局)가 발생했다.
 
이때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임인옥사 때 그는 그의 손자 [[김성행]]이 주동자의 한사람으로 지목되면서 그는 [[경상남도]] 거제도(巨濟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이듬해 1월에 [[경상북도]] [[성주군|성주]](星州)로 이배(移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