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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연'''(北燕 [[407년]]~[[436년]])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고구려 왕족 출신의 [[고운 (북연)|고운]](高雲)이 [[후연]](後燕)의 왕위를 찬탈하고 건국한 국가이다.
 
== 역사건국과 멸망 ==
선비족(鮮卑族)이 건국한 후연의 군주 [[모용희]](慕容熙)는 폭군이었다. [[407년]], 모용희의 황후가 사망하자 모용희는 신하들에게 큰소리로 곡하도록 명령하고 소리가 크지 않은 자들을 처벌하였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선비족화한 한족 출신의 신하 [[풍발]](馮跋)은 [[모용보]](慕容寶)의 양자 모용운(慕容雲)을 설득하여 모반을 일으켰다. 모용희는 폐위되었으며, 수도 용성을 공격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모용씨의 연나라를 후연, 고운의 연나라를 북연으로 구분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고운의 재위까지를 후연으로 보기도 한다.
 
후연 시기, 연나라는 [[고구려]](高句麗)와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고운이 즉위하자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은 [[408년]],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베풀었으며 고운 역시 이에 화답하여 북연과 고구려는 화친하였다. [[409년]], 고운은 측근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암살당하였다.
 
풍발은 고운이 암살되고 일어난 혼란을 평정하고 스스로 뒤를 이어 천왕에황제에 즉위하였다. 풍발은 정치에 힘써 국내를 안정시키는 한편 고구려와는 화친하고 화북의 강자로 등장한 [[북위 (북조)|북위]](北魏)와 대립하였다. [[430년]]에이 북위와의 대립은 풍발이 살이있을 때만해도 서로 대등한 양상이었으나 풍발이 죽자 북위가 우세를 가지게된다 풍발의 뒤를태자와 이어풍발의 동생 풍홍이 황제자리를 놓고 다투게되어 북연이 혼란에 빠진것이다 결국 동생 [[풍홍]](馮弘)이 승리하여 태자를 죽이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북연의 내전은 조정을 혼란과 동요케하여 국가의 위기로 이어졌으며 한편으론 북위의 칩입을 용이하게된 결과를 낳았다.
내전으로 인해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결국 풍홍이 예측한 대로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로 망명요청 하였으며 [[고구려]]는 2만의 병력을 보내 북위군보다 먼저 용성에 도착해 풍흥과 그 백성들을 구출해갔다. 고구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풍홍은 요동성에 머물며 재기를 다짐했다 그런데 자신의 처지에 생각도 하지않고 오만불손한 태도로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함부로 대하였다 이에 분노한 장수왕은 처제와 자식을 인질로 잡고 자신에게는 고구려의 외곽지역인 북풍으로 강제 이송시킨다 그러자 풍홍은 중국 남조의 [[송나라]]에 망명요청을했다 이에 응한 송나라가 사신 왕백구를 고구려로 보내 풍홍을 망명해줄것을 요청하자 풍홍을 위험인물로 간주하여 장수왕은 [[438년]]에 살해한다.
 
당시의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웠다. 이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자 풍홍은 고구려로 망명요청하였으며 [[고구려]]는 2만의 병력을 보내 북위군보다 먼저 용성에 도착해 풍흥과 그 백성들을 구출해갔다. 한편 풍홍은 고구려에서 [[438년]]에 살해되었다.
 
[[랴오닝 성]] 북요시 서관영자에서 북연의 재상 풍소불(馮素弗)의 분묘(墳墓)가 발굴되었으나 명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