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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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근거로 그가 바로 행재소로 달려오지 않고 [[광해군]]의 처소를 거쳐서 달려온 것을 근거로 들었다. [[선조]]가 일단 그런 이야기를 누차 들어오다가 성혼이 도착하자 대노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하교를 하여 변란 초기의 일까지 소급해 거론하였는데 그 사지(辭旨)가 준열하고 엄하였다. 즉시 성혼을 파직해야 된다, 처벌해야 된다는 여론이 나타났다.
 
그런데 [[김상헌]]이 찬한 신도비문에 의하면 왕의 피난 사실을 알고예측하고 있었으나 쉽게 가지 못했던 것이라 한다. '상이 장차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려 한다는 말씀을 듣고는 도성으로 들어가 국난(國難)에 달려가려 하였으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본래 산야에서 일어나 붕당을 한다는 죄목을 입어서 불원간에 장차 죄를 받을 것이니, 국가에 비록 위급한 일이 있으나 의리상 감히 가볍게 스스로 나아갈 수 없다. 대가가 만약 서쪽으로 행차하시게 되면 마땅히 길가에서 곡하며 맞이할 것이니, 만일 성상의 고문(顧問)을 입는다면 대가를 따라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오직 물러나 구학(溝壑)에서 죽을 뿐이다.’ 하였다.<ref name="kimsindo"/>'는 것이다.
 
==== 임진왜란과 정치 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