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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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력 ===
==== 관료 생활 초반 ====
과거 급제 직후 권지를 거쳐 1563년 1월 예조 좌랑, 2월 사간원 정언, 이조 좌랑, 그해 7월 이습관(肄習官)에 이르러 체직당하였다. 7월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그해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치고 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홍문관]] 부수찬, [[홍문관]] 교리, [[홍문관]] 수찬, 병조정랑, [[사헌부]] 지평 등을 지내고,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를 하였다. [[1563년]]에는 외척으로 전횡을 부리던 자신의 외삼촌 [[이량]]을 탄핵하여 퇴출시키기도 했다. 한편 평소 외삼촌 [[이량]]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어느 날 [[이량]]이 심의겸에게 '너는 박소립·기대승·윤두수를 무엇 때문에 좋아하는가? 이문형은 너더러 동방의 성인(聖人)이라고 한다는데 네가 과연 성인인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이량]]과 언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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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집안의 사람을 탄핵하는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고 이일로 심의겸은 곧은 선비로 칭찬을 듣고 명망을 쌓았다. 1563년 9월 홍문관 부수찬, 10월 홍문관 교리, 1564년 1월 병조 정랑, 2월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지평, 3월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이어 3월말 독서당 선발 인원이 결원되자 추가로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러나 문장이 우수하지도 못한데, 독서당(讀書堂)의 선발에 올라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도 많았다.<ref>명종실록 32권, 명종 21년(1566 병인 / 명 가정(嘉靖) 45년) 5월 18일(무신) 1번째기사 "홍문록과 제술에 피초된 문신을 시험보이다"</ref>
 
==== 요직 진출 ====
[[1564년]] [[6월]] [[조선 명종명종]]의 명으로 [[이산해]] 등과 함께 그 해의 과거시험때 쓸 그림 병풍의 시제를 지었다. 1564년 호당(湖堂)으로 사가독서에 들었고, 이후 사헌부지평(持平), [[성균관]] 전적, 1564년 8월 [[의정부]] 검상(檢詳), 10월 [[의정부]] 사인(舍人), 1565년 2월 [[사간원]] 사간(司諫)을 거쳐 경연관으로 [[명종]]이 친히 낸 제술 시험에 응시하였다. 이후 [[홍문관]][[홍문관]]부응교(副應敎)를 거쳐 5월 사복시 정(司僕寺正), 9월 홍문관 부응교, 11월 사간원 사간, 12월 홍문관 응교를 지냈다.
 
1566년 1월 사헌부지평,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바로 대사헌 박계현, 대사간 박응남, 사간 김계휘 등과 함께, 당시 음사를 분탕하고 파괴하는 과정에서 폭행죄로 개성부에 감금된 유생들의 석방을 탄원하였다. 그뒤 집의(執義)·대사간을 거쳐 1566년 2월 홍문관 직제학, 3월 군기시 정, 4월 다시 홍문관 직제학이 됐다. [[인순왕후]]의 친정 남동생이고, 할아버지 [[심연원]]은 영의정, 종조부 [[심통원]]은 좌의정인 덕에 가문의 후광으로 과거 급제 후 5년만에 정3품의 직책까지 초고속승진하였다.
 
1566년 7월 선비를 우대할 것을 청하는 차자를 올렸다. 1566년 8월 통정대부 동부승지로 승진, 윤 10월 우부승지가 되었다. 경연관을 거쳐 1567년 1월 이조 참의가 되었다. 과거 급제 후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그뒤 [[홍문관]] 직제학, [[군기시]] 정, [[승정원]] 동부승지, [[승정원]] 우부승지, 이조참의를 지냈다. [[선조]] 때, [[승정원]] 우승지,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1573년]]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을 때,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임명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때 [[김효원]]이 [[윤원형]] 집의 식객이었던 점과,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과 친하게 지내며 그의 집에 수시로 출입한 것을 문제삼아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뒤 [[홍문관]] 직제학, [[군기시]] 정, [[승정원]] 동부승지, [[승정원]] 우부승지, 이조참의를 지냈다. 1568년 7월 서인인 [[백인걸]]이 그가 외척이라고 지적했다가 역공격을 받고 파주로 낙향했다. [[1569년]] [[2월]] 우승지, [[8월]] 대사간, 9월 이조참의를 지냈다. 한편 1570년 대간에서 삭훈을 논할 때 누군가 그에게 [[인순왕후]]전에 청탁하여 삭훈을 성사시킬 것을 부탁했으나 거절하였다. 이 일로 [[백인걸]]로부터 삭훈할 마음이 없다며 공격당하였다.
 
{{인용문2|서리(胥吏)·액정(掖庭) 할 것 없이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참여된 자가 1천여 명에 달하는데 서로 결탁하고 있으므로 필사적으로 공론을 저지할 것이다. 만약 거론했다가 이루지 못하면 도리어 해가 있을 것이니 그만두느니만 못하다}}
 
그뒤결국 [[홍문관]]서리와 직제학액정, [[군기시]]기타 정,수종자들이 [[승정원]]방해할 동부승지,것이라며 [[승정원]]삭훈 우부승지,반대의 이조참의를뜻을 지냈다밝혔다. [[선조]] 때, [[승정원]] 우승지,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1573년]]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을 때,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임명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때 [[김효원]]이 [[윤원형]] 집의 식객이었던 점과,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과 친하게 지내며 그의 집에 수시로 출입한 것을 문제삼아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러나 [[김효원]]은 매장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동생이자 출계한 [[심충겸]]의 전랑 임용을 방해했다. 이후 알력이 커져 동서분당의 원인을 제공한다.
이후, [[사헌부]] [[대사헌]], 형조참판, 병조참판,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나, [[1574년]] [[대사헌]],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좌천되었다. [[1575년]] [[동서분당]]이 발생하자, [[서인]]의 [[영수]]로 지목되어, [[개성부]] 유수, [[전라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전주]] [[부윤]] 등 외직을 전전하다가, 다시, 내직(경직)으로 옮겨, 예조참판이 되고, 청양군(靑陽君)에 습봉되었다.
 
11570년 12월 대사간, 72년 7월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1572년]] [[이준경]]이 소를 올려 붕당의 출현을 예견하며 그가 소인들과 어울려 붕당을 결성할 것이라며 은유적으로 비난하였다. 그는 이를 불쾌히 여겼으나 대응하지 않았다. 572년 9월 춘당대(春塘臺)에서 이문(吏文)을 잘 제술하여 상을 받았다.
 
=== 김효원과의 갈등 ===
척신 출신이지만 구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사림]]들간에 명망이 높았다. [[명종]] 때, 외숙부 [[이량]]이 사림들을 탄핵할때, 반대로 외숙부 이량을 탄핵하여 축출시키기도 하였다. [[1573년]] [[김효원]]의 이조전랑 천거를 반대하여 사건이 발생하였다. 1573년 2월 병으로 세 번 상소를 올려 체직하였다. 3월 이조 참의, 8월 특지로 승진하여 대사헌이 되었다. 바로 외척(外戚)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없다 하여 상소하여 사직하니, 선조가 만류하였다.
 
[[1573년]] 심의겸이 이조참의로 있을 때, [[김종직]] 계통의 신진 세력으로서 [[김효원 (성암)|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그가 일찍이 권신이었던 [[윤원형]]의 집에서 묵었던 사실을 들어, 권력가에 아부했다 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1574년]]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이 되었고, [[1575년]]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후임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구세력은 심의겸을 중심으로 [[서인]]이라 했으며, 신진 세력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동인 (정치)|동인]]이라 하였다. 그 후 당쟁이 커질 것을 염려한 율곡 [[이이]]의 조정으로 개성부 유수,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되었다.
 
73년 9월 형조참판, 11월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경연특진관을 겸하다. 11월 병조 판서로 특별승진하였다. 12월 김귀영(金貴榮)·이후백(李後白)·유희춘(柳希春)·박승임(朴承任)·이식(李拭) 등과 함께 노비의 양인 아내 소생 자녀들의 신분을 종모법으로 정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1574년 2월 사헌부대사헌, 겸 경연관, 7월 부총관을 지냈다. 그런데 [[1575년]]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후임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구세력은 심의겸을 중심으로 [[서인]]이라 했으며, 신진 세력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동인 (정치)|동인]]이라 하였다.
 
76년 3월 무렵 이들의 갈등이 심화되어 왕조실록에 실리기도 했다. 그 후 당쟁이 커질 것을 염려한 율곡 [[이이]]의 조정으로 개성부 유수,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
 
=== 생애 후반 ===
1579년 2월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580년 함경 감사 재직 중 직책임명에 불만을 품은 남도 우후 이경(李璟)을 해임하였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81년 1월 병으로 함경감사직을 사직하였다. 그뒤 청양군이 되어 조정에 출사하다가 1581년 7월 이이와 정인홍 등의 합계로 양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척신 출신이지만 구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사림]]들간에 명망이 높았다. [[명종]] 때, 외숙부 [[이량]]이 사림들을 탄핵할때, 반대로 외숙부 이량을 탄핵하여 축출시키기도 하였다.
[[1573년]] 심의겸이 이조참의로 있을 때, [[김종직]] 계통의 신진 세력으로서 [[김효원 (성암)|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그가 일찍이 권신이었던 [[윤원형]]의 집에서 묵었던 사실을 들어, 권력가에 아부했다 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1574년]]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이 되었고, [[1575년]]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후임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구세력은 심의겸을 중심으로 [[서인]]이라 했으며, 신진 세력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동인 (정치)|동인]]이라 하였다. 그 후 당쟁이 커질 것을 염려한 율곡 [[이이]]의 조정으로 개성부 유수,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이
후, 함경도 관찰사, 전주 부윤,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1584년]] 이이가 죽은 후 동인이 득세하고 서인이 몰락하자 파직당하였다.
 
{{인용문2|심의겸은 폐부(肺腑)같은 척속(戚屬)으로 세업(世業)을 빙자하여 조정의 권력을 농락하면서 기세를 크게 부려 6∼7년 이래로 조정의 여론을 분열시켰으니 그 나라를 혼미 속에 빠뜨리고 조정을 오도한 죄가 큽니다. 바라건대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이시어 인심을 진정시키소서}}
[[1584년]] 심의겸을 변호하던 율곡 [[이이]]가 죽자, 파직되어, [[파주]]로 낙향해 살다가, [[1587년]] 별세하였다.
 
정인홍이 심의겸 탄핵을 주장할 때 이이는 부분 수용하여 동조하였는데, 정인홍이 심의겸에 이어 정철까지 탄핵하려 하자 이이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이 사건으로 대사헌 이이 등이 역으로 체직당하게 되었다. 1583년 복직하여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었고, 그해 5월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명원(金命元)으로부터 후임 적임자로 추천받았으나 왕이 허용하지 않았다. 그해 7월 동인이 대거 언관에 진출하게 되면서 연일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8월까지 그를 탄핵 공격하는 상소가 계속되었고, 이후 1584년 1월까지도 계속해서 동인계 언관들이 그를 공격하였다. 그뒤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1584년]] 이이가 죽은 후 동인이 득세하고 서인이 몰락하자 1585년 5월부터 다시 사간원과 홍문관에서 계속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그해 9월 파직당하였다.
 
이후 파주(坡州) 촌사(村舍)에 물러나 조용히 지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었다. 평소 매양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인용문2|밥상에 조복(條鰒) 요리를 올리고 입으로 사론(士論)을 말하였으니, 남의 말을 듣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대개 조복은 금중(禁中)의 특이한 반찬으로 외척에게 나누어 보내는 것이다.
 
[[1584년]] 심의겸을 변호하던 율곡 [[이이]]가 죽자, 파직되어, [[파주]]로 낙향해 살다가, [[1587년]] 별세하였다9월 7일 졸하였다. 사후에도 북인과 남인 계열 인사들로부터 수시로 비방,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 사후 ==
그의 날카롭고 비타협적인 성격은 당쟁의 실마리를 만들어 조선 왕조의 치명적인 적폐의 요인이 되게 하였다. 김우옹은 선조에게 심의겸과 김효원은 본래 붕당을 꺼려했으나, 그들의 주변 사람들이 파당을 만들어 붕당이 더욱 심해진 것이라고 상소하였으나, 선조는 심의겸을 붕당의 원흉으로 지목하였다.
 
의금부 경력 나덕윤은 '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은 단지 명예와 이익이나 따지며 노는 인물들'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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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 아버지 [[심홍]]
* 양 어머니 청주한씨, 사직 한윤원(韓胤源)의 딸, 대사헌 한기문(斯文)의 손녀 
 
== 기타 ==
유교 경전에도 밝아 고경의 내용을 자유자재로 인용할 줄 알았다.
 
한편 이량의 심복이었던 이들 중 몇명은 그의 측근이 되었는데 심순, 정응두(丁應斗) 등이 그들이다. 특히 이량의 편에 붙었던 심순(沈筍)은 그와 [[심통원]]에게 자주 찾아갔고, 일족이라 하여 비호하기도 했다.
 
1569년 6월 7일에 심의겸은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기력이 없고 나약합니다. 중국에서는 엄숭(嚴嵩)이라는 자가 바야흐로 뜻을 얻어 제멋대로 악행을 저지를 때, 직간하던 신하가 살육당하는 것을 추응룡(鄒應龍)이 목도하고는 피하지 않고 직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왕조에서는 20년 동안 한 사람도 말한 자가 없었습니다.’ 하니, 정탁(鄭琢)이 아뢰기를 이 말이 맞습니다.’ 하였고, 윤근수(尹根壽)는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국토가 한쪽 변방에 치우쳐 있어 품성이 후하지 못한데, 중국 사람들은 쇠약하고 혼란한 세상을 당할 때마다 일컬을 만한 선비가 많이 나왔습니다. 엄숭이 권력을 전횡하자 급사중(給事中) 양계성(楊繼盛)이 엄숭의 죄를 논했다가 살해되고 왕숭무(王崇武)는 유배되었지만 끝내는 추응룡이 탄핵의 상소를 하여 축출하고 말았습니다. 윤원형이 국권을 잡고 있을 당시 신하 중에 그 누구도 그의 죄를 말한 사람이 없었으니, 살기를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함이 극심하다고 하겠습니다.’ 라고 지적하였다.<ref>선조 3권, 2년(1569 기사 / 명 융경(隆慶) 3년) 윤6월 6일(무신) 1번째기사 "주강에 《논어》를 강하고 기대승이 앞 시대에 소인이 득세한 사실을 진달하다"</ref>
 
== 주석 ==
<references/>
 
== 함께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