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 동수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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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년]] [[8월]], [[견훤]]은 마침내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신라]] [[문경시|근암성]](현재 [[문경시]])과 [[영천시|고울부]](현재 [[영천시]])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수도 [[경주시|금성]](현재 [[경주시|경주]])로 진군했다. 위기를 느낀 [[신라 경애왕]]은 고려 왕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왕건은 신라를 돕기 위하여 [[9월]] 초에 시중 공선에게 1만 명의 군사를 맡겨 원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고려군이 미처 신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후백제군이 [[경주시|경주]]를 점령하여 친고려적인 행동을 자주 하였던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였으며 경순왕을[[경순왕]]을 새 왕으로 세웠다. 또한 왕제 효렴과 재신 영경 등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보물들을 약탈한 후에 귀환길에 올랐다. 이 소식을 접한 [[왕건]]은 크게 분노하여 친히 5000명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퇴각하는 후백제군을 격파하기 위해 출전했다.
 
== 전투 과정 ==
[[왕건]]은 발빠른 기병대를 이끌고 후백제군보다 한 발 앞서 [[대구]] 공산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퇴각하는 후백제군이 접근하는 순간 공격을 단행할 계략을 세웠다. 그러나 [[견훤]]이 이 계략을 미리 알아채고는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공산공산으로 아래에서향하던 대기하고 있던 왕건군을고려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본래 접근해오는 후백제군을 기습공격하기로 하였던 고려군이 오히려 맹공을 당하게 되자 5000명의 고려군은 우왕좌왕하며 혼란에 빠졌다.
 
고려군은 곧 후백제군의 공격에 밀려나 포위당하였고, [[왕건]]은 일생 일대의 위기에 처했다. 이때 [[고려]]의 개국 공신 중 하나였던 [[신숭겸]]이 [[왕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왕의 갑옷을 입고 백마에 올라 군사들을 지휘하였다. 이에 후백제군은 신숭겸을 왕건으로 착각하여 화살을 쏘아 신숭겸을 죽이고 그 수급을 취하였다. 또다른 고려의 장수 [[김낙]]도 [[왕건]]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어 [[전의갑]]과 [[전이갑]] 형제도 싸우던 중에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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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Battle of Mt.Kongsan.jpg|thumb|left|250px|[[공산 전투]]에서<br>(공산성 전투에서 ([[신숭겸]] 장군(우측에 선 이)과 [[태조 왕건]](오른쪽에서 두 번째 앉은 이))]]
 
[[고려]]는 이 전투에서 건국 이래 최대의 패전을 당하게 되고 이후로 [[후백제]]와 수차례 싸우면서 계속 패하여 수세에 몰렸다. 이러한 상황은 [[견훤]]은 [[최승우]]를 시켜 왕건에게 보낸 서신인 《대견훤기고려왕서》에서 잘 드러난다. [[왕건]]은 후에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과 싸워서 대승을 거둔 후에야 전세를 뒤엎으면서 수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공산 전투 이후에 태조는 목숨을 바쳐 자신을 구해낸 신숭겸의 시신을 찾아내어 통곡하며, 광해주 비방동(현, 춘천시 비방동)에 예장한 다음 직접 제례를 지내고 그 자리에 순절단(殉節壇)을 모시고 대구지방에 지묘사(智妙寺)라는 절을 지어 공의 명복을 빌게 하였고, 세개의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후백제군이 신숭겸의 시신을 왕건의 것으로 착각하고 그 목을 가져갔는데, 이에 왕건은 시신의 목을 황금으로 조각하여 함께 매장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