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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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수양대군은 상당한 수의 무사들을 불러모았는데, 그도 [[한명회]](韓明澮)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의 진영에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이 당시의 집정대신이며 그의 반대파였던 [[김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을 때, 적극적으로 그 일에 관여한 공로로 정난공신(靖難功臣)2등에 책록되고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으며, [[조선 세조|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2등에 책록되고 양산군(楊山君)에 봉하여졌다.
이후 공조판서·지중추원사 등 중앙의 주요직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처형되고, 아들들은 성주의 관노가 되었다. 이러한 그의 언동이 기록된 《[[세조실록]]》에서 당시의 사관은 그가 훈구대신임에도 불구하고 변방에서만 근무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평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언동을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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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 : 강진 유씨 - 유극기의 딸
* 9촌고모뻘 : 혜빈 양씨(세종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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