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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령부]]판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민치구]]와 부인 전주 이씨의 차남이었다. 외가 쪽으로는 도정궁으로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었다. 누이인 [[여흥부대부인]]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 [[흥선대원군]]과 혼인하면서 왕실의 근친(近親)이 되었다.
본래 [[민치구]]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11촌 아저씨뻘 되는 명성황후의 생부 [[민치록]]의 양자로 입양되었다.<ref>생부는 민유중의 아들 민진영의 4대손이며, 양부 민치록은 민진영의 이복형 민진후의 4대손이었다.</ref> 이에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봉사손 자격으로 철종 12년([[1861년]] 신유해)에 [[음서 제도|음서]]로 관직에
고종 3년([[1866년]]), 양누이동생인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되면서 [[이조 (행정기관)|이조]][[참의]](정3품 당상)으로 임명되었으며, [[1867년]] [[1월]] [[호조]][[참판]]에 승진되었다. 그뒤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일본]]이 국서를 보내 와서 국교를 요청하였을 때 흥선대원군이 국교 수립에 반대하자 그에 맞서 찬성하였고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 족당의 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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