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승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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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년([[1866년]]), 양누이동생인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되면서 [[이조 (행정기관)|이조]][[참의]](정3품 당상)으로 임명되었으며, [[1867년]] [[1월]] [[호조]][[참판]]에 승진되었다. 그뒤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일본]]이 국서를 보내 와서 국교를 요청하였을 때 흥선대원군이 국교 수립에 반대하자 그에 맞서 찬성하였고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 족당의 수령이 되었다.
 
[[1874년]] [[음력 11월 28일]] 신원불명의신원미상의 남자가승려가 주고그에게 선물이라며 선물로진상품을 위장된갖다 폭약바쳤고, 폭발이것을 사고로들고 죽었는데 그의개봉하던 중 상자 안에 들어있던 화약이 터지면서 민승호, 민승호의 아들, 양어머니 감고당 한산이씨와한산이씨 아버지등이 [[민치구]], 아들도모두 그자리에서 폭살당하였다사망했다.<ref name="p315">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5쪽. </ref> 신원미상의 승려가 그에게 선물이라며 진상품을 갖다 바쳤고, 이것을 들고 와 개봉하던 중 상자안에 들어있던 화약이 터지면서 민승호, 민승호의 아들, 양어머니 감고당 한산이씨 등이 모두 그자리에서 사망했다. 그뒤 대를 잇기 위해 [[민태호]](閔台鎬, [[민치구]]의 장남과는 한자가 다른 동명이인)의 아들 [[민영익]]을 양자로 들였다.
 
이후 [[1892년]] 봄 운현궁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가 민승호의 죽음이 흥선대원군과 관련이 있다고 여긴 명성황후의 보복이라는 주장이 있다.<ref name="p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