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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령부]]판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민치구]]와 부인 전주 이씨의 차남이었다. 외가 쪽으로는 도정궁으로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었다. 누이인 [[여흥부대부인]]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 [[흥선대원군]]과 혼인하면서 왕실의 근친(近親)이 되었다.
 
본래 [[민치구]]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11촌 아저씨뻘 되는 명성황후의 생부 [[민치록]]의 양자로 입양되었다.<ref>생부는 민유중의여양부원군 [[민유중]]의 아들 민진영의 4대손이며, 양부 민치록은 민진영의 이복형 민진후의[[민진후]]의 4대손이었다. [[민유중]]의 맏아들인 [[민진후]]는 [[민진원]], [[인현왕후]]와 동복남매로 [[송준길]]의 외손자이다.</ref> 이에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봉사손 자격으로 철종 12년([[1861년]] 신유해)에 [[음서 제도|음서]]로 관직에 올랐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UM_6JOc_9999_007688&isEQ=true&kristalSearchArea=P</ref> [[1863년]] 누이의 아들([[조선 고종|고종]])이 왕으로 즉위하였다. 고종 1년([[1864년]]) [[과거 제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같은 해 홍문관 교리(종5품)을 제수받았고, 곧 응교(정4품), 전한(종3품), 규장각 직각(정3품), 가례도감 부제조(정3품 당상)로 파격 승진을 거쳤다.
 
고종 3년([[1866년]]), 양누이동생인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되면서 [[이조 (행정기관)|이조]][[참의]](정3품 당상)으로 임명되었으며, [[1867년]] [[1월]] [[호조]][[참판]]에 승진되었다. 그뒤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일본]]이 국서를 보내 와서 국교를 요청하였을 때 흥선대원군이 국교 수립에 반대하자 그에 맞서 찬성하였고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 족당의 수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