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콜모고로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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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모고로프는 [[1903년]] [[4월 25일]] [[러시아 제국]] [[탐보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미혼모였고 요절하여 이모 손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귀족이었으나 아버지는 혁명운동에 종사하였고 [[러시아 내전]]에 참전하였다가 실종되었다. 아마도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콜모고로프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였으나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가 내전으로 어수선한 시기였기 때문에 교육의 기회를 놓칠뻔 하였지만 양친을 잃은 그를 입양한 헌신적인 이모는 콜모고로프를 [[모스크바]]로 데려와서 고등학교 (김나지움)를 졸업시켰다. 이후 그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여기서 그는 수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하였으며, 그가 대학에서 처음 낸 논문은 수학이 아니라 역사학에[[역사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수학적 연구도 병행하여 [[1922년]] [[푸리에 해석]]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 논문은 "[[거의 모든곳에서모든 곳에서]] (almost everywhere: [[측도론]]에서는 주로 a.e.라는 약어로 표기한다) 존재하는 푸리에 급수" 의 예를 보인 것으로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은 논문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19세였다.
러시아는 이전부터 확률론에 강한 전통이 있어서 많은 대가들을 배출하였으며 대표적으로 [[안드레이 마르코프]]나 [[체비셰프파프누티 체비쇼프]] 등이 있었다. 콜모고로프가 학부때 연구하던 [[푸리에 급수는급수]]는 해석학에[[해석학]]에 속한 것이었으나, 이후 러시아 수학계의 확률론의 전통을 이어받아 콜모고로프는 확률론에 관심을 보였고, 학부를 마치고 바로 대학원에 진학하여 이 방면의 연구를 계속하였고 [[1929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확률론에 관한 업적으로 그는 명성이 높아졌으며 [[1930년]]에는 오랜 기간동안 서유럽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1931년]] 모교인 [[모스크바 대학교]]의 교수에 임용되었고, [[1933년]]에는 명저 《확률론의 기초》를 내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따로따로 발전되어 오던 확률론과 해석학의 [[측도론]] (measure)을 결합하여 현대 확률론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확률론 뿐만 아니라 그는 수학 여러분야에 족적을 남겼는데, 대수학이나 집합론의 연구 업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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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35년]] [[모스크바 대학교]]의 확률론 회장으로 뽑혔고, [[1939년]]에는 [[소비에트 연방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다. [[1938년]]에 발표한 《정적 확률 과정론 예측을 위한 기본 정리》라는 논문은 [[확률 과정]]론(스토캐스틱 프로세스)을 확립한 논문으로서 마르코프 과정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 정리는 냉전 중에 군사적으로 응용이 되었다. 마르코프 과정은 현재에도 [[공학]], [[물리학]], [[경제학]] 등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이후 관심분야를 [[물리학]]으로 돌려서 [[난류 (역학)|난류]]에 관한 연구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1942년]] 안나 드미트리예브나 예고로바와 결혼하였고 [[1957년]]에는 [[힐베르트의 문제|힐베르트가 남긴 23개의 난제]] 중 13번 문제를 풀어냈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알고리즘 복잡성론을 확립하였다. 이 공로로 [[1962년]] [[발잔상]]을 받았다.
 
그는 영재교육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수학 영재 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음악에 관한 영재교육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그는 소련의 영재교육을 개혁하였고 그의 이름이 붙은 콜모고로프 영재학교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