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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8월 26일]] 국방부인회 경성지부 대표로 일본군 경성사단 사령부에 4,800원을 헌금할 때 개인 자격으로 100원을 헌금했으며 1941년 9월 국방부인회 경성지부장을 역임했다. 1941년 9월 20일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순회 강연에 참석했으며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과 부인대(조선임전보국단 산하 조직) 지도위원을 역임했다. 1941년 11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주최로 열린 시국 대책 순회 강연회에서 함경남도 지역 강사로 활동했다. [[1942년]] [[5월 15일]] 매일신보사 주최로 열린 좌담회 〈징병제 실시를 앞두고 가정 생활의 대전환〉에서 조선 여성들에게 '강한 제국의 군인'을 만들기 위한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1942년]] [[5월 23일]] [[조광]] 주최로 열린 좌담회 〈징병령과 반도 어머니의 결의〉에서 징병 제도를 찬양하고 조선 여성들에게 '군국의 어머니'가 될 것을 주장했다.
 
《[[매일신보]]》와 《[[삼천리 (일제 강점기의 잡지)|삼천리]]》, 《[[신시대]]》 등 각종 매체에 〈칠첩반상 차려놔도 수저 눈에는 한두 접시〉(1939년 1월 4일 조선일보), 〈규모 있는 살림살이는 부엌 청결에 달렸다〉(1939년 8월 3일 조선일보), 〈국민개로강조주간(國民皆勞强調週間) - 방공호 파는 데도 개로정신을 발휘하자〉(1941년 9월 24일 매일신보), 〈목숨을 아껴 말라 - 세상에 나서 값 있는 죽음을〉(1943년 11월 17일 매일신보), 〈시국은 정말 중대하다〉(1944년 2월 25일 매일신보) 등의 글을 기고하면서 징병 제도와 지원병 제도, 학병 제도를 찬양하고 일본의 침략 전쟁에 협력할 것을 촉구하는 글들을 기고했으며 특히 [[1943년]] [[2월 27일]] 매일신보사 주최로 열린 〈개병(皆兵)의 노래 모집〉 행사에 대해 "황군이 행군하며 환호(歡呼) 소리를 듣는 듯하다"고 평가하면서 징병 제도와 지원병 제도, 학병 제도를 찬양했다. [[1943년]] [[10월 12일]] 대일본부인회 조선본부 이사로 임명되었으며 [[1944년]] [[2월 25일]] 대일본부인회 이사로 임명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교육/학술 부문과 친일단체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