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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붕의 풍기 군수 시절에 대한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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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붕'''(周世鵬, [[1495년]] ~[[1554년]])은 [[서원]]을 창시한 [[조선]]의 학자·문신이다. 자는 경유(景遊), 호는 신재(愼齋)·손옹(巽翁)·남고(南皐)이며, 시호 문민(文敏)이다.
[[1522년]]([[조선 중종|중종]] 1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가 되어 [[사가독서]]한 후 검열·부수찬 등을 지내다가 이항의 소지를 공공연한 자리에 꺼낸 문제와 관련하여, [[김안로]]의 배척을 받아 좌천되었다.<ref>중종 73권, 27년(1532년) 12월 7일 2번째기사 </ref> 그 후 곤양 군수를 거쳐 풍기 군수로 있을 때,
풍기 군수에 있을 때, 재산 문제로 동생과 다툰 한 백성이 있었는데, 주세붕은 그 형으로 하여금 제 아우를 업고 종일 동헌의 뜰을 돌게 하였다. 그가 몹시 지치게 되었을 때에 불러 ‘어릴적 동생을 업어 기를 때에도 다투어 빼앗을 생각을 가졌었느냐?' 하니 자신의 욕심을 부끄럽게 여기고 물러갔다고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세붕을 비웃었으나, 얼마 안가 고을의 사람들이 모두 그의 솜씨에 감복하였고, 실록의 사관은 '유학을 겨우 알고 있으나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켰다.'라고 그를 평했다.
[[1542년]](중종 37) 백운동에 [[고려]] 말의 학자 [[안향]]의 사당을 세웠다. 이듬해 [[백운동 서원]](소수 서원)을 창설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서원이다. 실록에서는 '''사당의 좌우에 학교를 세워 유생이 거처하는 곳으로 하고, 약간의 곡식을 저축하고, 이자를 받아서, 고을 안의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 준수한 자가 모여 먹고 배우게 하였다. 당초 터를 닦을 때에 땅을 파다가 구리 그릇 3백여 근을 얻어 중국에서 책을 사왔는데, 경서(經書)뿐만 아니라 무릇 정·주(程朱)의 서적도 없는 것이 없었으며, 권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ref>중종 95권, 36년(1541년) 5월 22일 1번째기사 </ref>
이항과 관련한 문제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다른 유학자들과는 달리 타 학문에 대한 유연한 사고방식과 백성을 위한 마음가짐의 선비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기록했다. 흉년이 들었을 때, 자신의 재산을 털어가면서 백성들을 구황하였는데, 그의 구황실적은 도내 제일이었다.<ref>중종 98권, 37년(1542년) 윤5월 5일 2번째기사</ref>
그 후 직제학·도승지·대사성·호조 참판을 역임하고, [[1551년]] 황해 감사로 있을 때 해주에 수양 서원(문헌 서원)을 창설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죽은 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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