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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동'''([[1947년]] [[1월 14일]] ~ )은 [[성균관대학교]] 경제학부 교수이다.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때 서울로 왔다. 이후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거친 그는 1965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 1969년에 졸업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한국은행]]에 취직하였지만, 대학교 시절의 동아리 활동이 문제되어 몇달만에 해직당했다. 이후 이런저런 직장을 전전하던 그는 국제경제연구원 원장이던 정재석 전 부총리의 눈에 띄어 연구원으로 채용된다. 1978년에는 유학을 떠나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 석사,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리노이대(University of Illinois) 조교수를 거쳐, 1989년 귀국하여 [[성균관대학교]] 경상대학 교수가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였다. 경실련에서 정책위원장 활동을 하면서, [[OECD]] 가입 반대, [[한국은행]] 독립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재벌과 부동산 문제를 집중 제기하였다. 1990 - 1991년에는 MBC 라디오 칼럼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1998년에는 [[국민의 정부]]의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정책수석을 역임하였다. 1999년에는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새천년 국가비전(New Millenium National Vision)수립 작업을 주도하였다. 2002년부터 4년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이명박 정부]]들어 누리꾼 [[박대성 (1978년)|미네르바]]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지자, "미네르바는 가장 뛰어난 경제스승"이라며 그를 옹호하고, 박대성의 재판에 변호인측 증인으로 참여하였다.
'''김태동'''([[1947년]] [[1월 14일]] ~ )은 [[성균관대학교]] 경제학부 교수이다.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때 서울로 왔다.
 
이후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거친 그는 1965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 1969년에 졸업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한국은행]]에 취직하였지만, 대학교 시절의 동아리 활동이 문제되어 몇달만에 해직당했다.
 
이후 이런저런 직장을 전전하던 그는 국제경제연구원 원장이던 정재석 전 부총리의 눈에 띄어 연구원으로 채용된다. 1978년에는 유학을 떠나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 석사,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리노이대(University of Illinois) 조교수를 거쳐, 1989년 귀국하여 [[성균관대학교]] 경상대학 교수가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였다. 경실련에서 정책위원장 활동을 하면서, [[OECD]] 가입 반대, [[한국은행]] 독립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재벌과 부동산 문제를 집중 제기하였다. 1990 - 1991년에는 MBC 라디오 칼럼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1998년에는 [[국민의 정부]]의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정책수석을 역임하였다.
1999년에는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새천년 국가비전(New Millenium National Vision)수립 작업을 주도하였다.
 
2002년부터 4년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이명박 정부]]들어 누리꾼 [[박대성 (1978년)|미네르바]]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지자, "미네르바는 가장 뛰어난 경제스승"이라며 그를 옹호하고, 박대성의 재판에 변호인측 증인으로 참여하였다.
 
 
== 참고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