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치 요시타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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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분 11년([[1542년]]) [[이즈모노쿠니|이즈모]]로 공격 방향을 돌려 갓산토다 성을 공격하지만, 지배하의 영주들의 배신으로 아마고 하루히사에게 대패한다. 게다가 이 전투에서 양자로 들인 [[오우치 하루모치]]를 잃었기 때문에, 요시타카는 정치적 관심을 잃게 된다. 예전부터 문예에 관심이 깊었던 요사타카는 문치파인 [[사가라 다케토]] 등을 중용한다.
 
이 때문에 무단파인 [[스에 하루카타|스에 다카후사]]와 [[나이토 오키모리]] 등과 대립하게 된다. 그런 와중 덴분 16년([[1547년]]) 덴류지의 [[사쿠겐 슈료]]를 견명사로 임명해 명나라로 파견하고, 덴분 19년([[1550년]]) 야마구치 온 [[프란시스코 자비엘]]과 면담을 가진후 그리스도교의[[로마 가톨릭 교회]]의 포교를 허락한다. 그리고, 야마구치를 교토풍으로 정비해 독자적 문화로 발전시킨다.([[오우치 문화]])
 
덴분 19년([[1550년]]) 스에, 나이토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정보를 받아, 요시타카는 오우치 군을 이끌고 야마구치야카타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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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에서도 고서를 좋아하는 등 복고주의적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 사료된다. 그러나 오우치가 역대로 본다면, 그러한 경향이 강하고, 결코 부정적 면이라고 할 수 없다. 사실, 야마구치는 서쪽의 교토라 불릴 만큼 번영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 정책에 관해서도 보수적이라 사치금지령과 지세징수에 관한 법령을 반포한다. 사찰과 신사의 부흥을 위해 많은 기부를 했으며, 다이자이다이니로 되자 다이후(막부 또는 다이묘를 가리키는 경어)라 선포한다. 그리고, 가신단의 관위도 다른 센고쿠다이묘와 같이 자기 멋대로 관위를 부여한게 아니라, 조정에 주청해 받은 실제 관위였다. 이와 같이 복고적인 정치형태를 많이 볼 수 있다.
* 중국의 [[명나라]], [[조선]]과 무역을 했고, 더 나가 오우치씨는 관령가문인 호소가와씨와 싸워 명과 조선에 대한 무역을 독점한다. 조선으로부터는 [[대장경]] 등 서적을 수입해 독자적인 오우치판으로 다시 출판한다. 또, 요시타카는 야마구치를 교토풍으로 정비하고, 그리스도교로마 가톨릭의 포교를 허락하는 등, 야심이 풍부하고,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결코 무능한 무장이 아니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요시타카가 신임을 잃은 것은 무단파인 스에 다카후사가 강력히 밀어붙인 아마고 공격이었고, 그 전투에서 패한 것도 한 원인이라 생각된다.
* 다카후사와 대립한 원인은 문치, 무단파의 대립외에 스에씨가 이전에 횡령한 [[도다이지]]의 옛 영지를 반환하도록 했기때문이라 생각된다. 오우치씨는 후다이 가신이 영지를 다스리고 이를 토대로 여러 영지를 다스리는 일종의 연방제 국가였다. 이 때문에 그들과 긴밀한 신뢰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면, 상당히 워험했다.
* 말년에 문약한 경향이 있어 바보같은 무장이라는 평이 많지만, 실은 문치파를 중용한 것은 다이묘 자신과 가까운 가신단에 의한 다이묘 권력의 강화를 꾀했기 때문에, 정치적 권력은 강화했지만, 군사면은 슈고다이와 호족에 일임했기 때문에, 역으로 슈고다이의 독립성을 강화시키는 꼴이 되었다.